1998년 x월 x일
오래간만에 이 공간에 들어왔더니 읽을거리가 많아서 좋았다. 특히 이곳에서 이름을 익힌 두 사람의 글이 기억에 남는다. 한 사람은 생업을 그만두고 문학의 길로만 정진하겠다는 뜻이 있었는데 가슴 한 곳에 둔한 자극이 느껴진다. 도대체 문학이 무엇이 길래 이렇듯 사람을 떠돌게 만드는 것일까?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한 분은, 나에게 문학은 구원이다, 라고 확언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내 몸은 비록 개똥밭을 뒹굴지언정 마음속으로는 구원의 깃발을 높이 들고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또다시 문학에 대해 회의가 생긴다. 문학이 과연 나를 구해 줄 것인가, 내가 문학을 위해 희생한 어떤 것들에게 얼마큼의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등등. 그러나 나는 아직 해답을 알지 못한다. 단지, 자꾸만 더러운 팔자라는 생각만 들뿐...
또 한 사람의 글은 중간에 헤세를 얘기하다가 [유리알 유희]를 언급했는데 그 제목을 보는 순간 갑자기 까마득히 잊었던 첫사랑이 생각났다. 내가 ‘사랑’이란 단어를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 평생 ‘사랑’이란 감정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을 내게 그래도 그리움과 후회와 번민의 경험으로 ‘이런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걸까?’하고 궁금하게 만들었던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권했던 책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유리알 유희]는 기억나는 것이 마지막 장면밖에 없다. 모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제 막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려는 아름다운 청년이 휴가를 얻어 어머니와 누이가 있는 바닷가로 갔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가 잠깐 집으로 들어 간 사이 혼자 모래밭에 앉아 있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여자(둘 이었었나?)를 발견하고 물에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고 자신은 빠져죽는다. 신과 인간에게 크게 사랑을 받을 아름다운 인간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을(그와 비교할 때) 위해 희생하는 허무하고 아이러니컬한 엔딩이다. (읽은 지가 하 오래되어서 정확한지를 모르겠다. 혹시 틀린 부분이 많다면 양해를 바람. 집에 책이 있으면 확인을 해 볼텐데 오래 전에 누군가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았음.)
유리알 유희의 주제도 지금 확실히 잡히지 않는다. 다만 눈앞에 거대한 빛이 쏟아지는 바다가 보이고 찰랑대는 수면 위에 햇살이 유리알처럼 반짝이고 있는 광경이 환상처럼 느껴질 뿐.
첫사랑 얘기를 더 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댁은 발레리나처럼 예쁩니다’하고 말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핸섬보이라고 칭했던 것에 대한 화답이긴 했어도 나는 그의 비유가 놀라웠다. 세상에, 내가 한때 발레를 배운 적이 있기는 했어도 기초뿐이었는데 대뜸 발레리나에 비유하다니... 우리는 우스꽝스럽게도 눈에 깍지가 낀 셈이었다. 그는 내 주변의 몇 사람에게 내가 아주 예쁘다고 말했다가 빈축을 산 일도 있다.
그가 나를 만난 것은 어쩌면 그의 일생에 도움이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는 독일에서 나온 어떤 여자를 만나기로 했었다. 독일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그에게 그 약속은 중요한 것이었을 텐데도 그는 그 여자를 내버려두고 나를 따라다녔다. 결국 유학을 포기하고 S대 대학원에 진학을 하긴 했는데, 어쨌든 일생을 통해 영향을 미칠 그의 계획은 어긋난 셈이다.
우리는 밤거리를 헤매며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할 때마다 감탄을 했다.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어떻게 여자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어떻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지?’ 등등. 당시 철학과 3학년이었던 그는 세상의 모든 여자는 머리가 텅 비어서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나는 세상에 제대로 된 남자가 없으니 아예 인연을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만남은 서로에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우리의 약속 장소는 종로서적센터가 대부분이었는데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그저 그곳에서 책을 뒤적이노라면 언젠가 나타났기 때문에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남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기 때문에 찾기가 쉬었다. 그곳에서 상대가 어디에 있는가만 가끔 확인하며 책을 읽다가 싫증이 나면 서로 신호를 보내 밖으로 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가로수 밑을 걷는 것이 정해진 코스이기도 했다. 그가 졸업해 나가기 1년여 동안 우리는 연극을 보고 대학농구를 보고 축제에 참가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기도 했다, 순전히 걸어다니면서.
아무래도 이쯤에서 줄여야겠다. 새삼스레 사랑타령을 하려니 갑자기 내 자신이 역겹게 느껴진다. 아니, 내친김에 조금 더 설명을 해버릴까?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아주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한 가지는 그가 나보다 2년 연하라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2년 연하가 아니라 20년 연하라도 붙잡을 용기가 있지만(그럴 일은 전혀 없을 테니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임, 마그리뜨 뒤라스는 35년 연하와 살았다던가? 그러나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고 나 역시 뒤라스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 그 당시만 해도 내 도덕적인 잣대는 나 자신에게 엄격하고 가혹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연연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또한 나는 그가 다니는 학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눈 속에 나를 향한 열망을 강하게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표나지 않는 방법으로 인연의 줄을 끊고 말았다. 그는 졸업식 날 나를 찾아와서 ‘내 일생에서 가장 좋은 여자는 당신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좋은 여자가 어떤 것인가 묻고 싶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나 역시 가슴에 묻어둔 ‘사랑’이란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그와의 일을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때 사랑이라는 말이 입밖에 나왔더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깨끗이 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전에 [첫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그와의 일을 짧게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마무리는 조지훈 시인의 [민들레 꽃}이란 시였다.
민들레 꽃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면/ 노란 민들레 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그런데 요사이는 대중가요 가수 임희숙이 불렀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라는 노래가사로 바꾸고 싶어진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너를 보내는 들판엔 마른 바람이 흐르고
네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오래도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람아 내 하나의 사람아
뒤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가
조지훈님의 시와 대중가요 사이에는 엄청난 내 삶의 괴리가 존재한다. 나는 깊이를 모를 곳으로의 추락을 수 없이 반복하며 변화했다. 아르바이트를 한답시고 아침 일곱 시 반에 집을 나와 아홉 시면 돌아가는 일과 속에서 전철에서 보내는 시간은 왕복 4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책을 읽는 대신 눈을 감고 있다. 시력을 혹사하는 일이어서 차안에서라도 쉬게 하려 함이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떴을 때 어두운 전철 유리창에서 아주 추하고 낯선 여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저게 누구야? 저게 나라구? 아니야, 아닐 꺼야... 그건 분명 세파에 찌든 나의 모습인데도 나는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아, 옛날이여! 누구는 나를 발레리나처럼 예쁘다고 했었고 또 동물원에 함께 갔던 누군가는 나를 머리에 관을 쓴 학(관학) 같다고 했었고 또 붓글씨를 가르치던 누군가는 나를 여섯 가지 붓글씨체에서 가장 멋들어진 <예서> 같은 여자라고 했었는데 그 여자들은 다 어디 갔지?
아르바이트 일당으로 어제는 사만 원을 벌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잡념이 들어서 이만 팔천 원밖에 못 벌었다. 돈을 조금 모아서 구월에는 정동진에 가서 일출을 보고 시월에는 토말에 가보고 싶다. 땅 끝에 가서 앞으로 내가 사는 것이 나을지 죽는 것이 나을지 다시 한 번 검토해볼 생각이다. 가는 길에 김지하씨의 시집이나 한 권 들고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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