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빈센트 반 고흐/어빙스톤

푸른얼음 2007. 1. 4. 14:23
 

1998년 x년 x일


           고통의 불꽃[빈센트 반 고흐)

          원제:[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어빙스톤/최승자 옮김


1981년도에 발행된 이 책을 지금에야 만난 것은 아마도 ‘고통’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 고통을 이해하기 힘들어지면 아무에게나 SOS를 치는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 그럴 때마다 응답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아직 내게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없지는 않아서 싫은 내색하지 않고 반겨주는 사람을 택해 그 집을 방문하기도 한다, 고통 때문에 반쯤은 멍청해진 상태로.

최근에 찾아 본 친구 하나는 내게 식사와 그리고 무슨 영양차하고 술까지 권하고는 자기가 쓴 소설을 읽어달라고 컴퓨터에서 3편이나 뽑아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왜 그것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입밖에 내지는 못하고 대신 잘 꾸며놓은 그 친구의 서가에 꽂힌 책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빈센트]였다. 고흐의 화집을 갖고 있어서 그에 관한 것은 웬만큼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몇 장 넘기다보니 나를 끌어당기는 무엇이 있었다.

-‘고통의 사제, 끊임없이 자신의 고통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서야 자신이 물리적으로 살아있음을 정신적으로 느끼는 사람.’...

그 친구는 내가 책을 빌려가겠다고 하자 역시 싫은 내색하지 않고 빌려주며 대신 책에 삽입된 몇 장의 그림이 손상되지 않도록만 신경 써달라고 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까지 따라나오며 한 마디했다. 고gm 같은 사람도 있으니 날더러 용기를 가지라나?

나는 집에 와서 허겁지겁 그 책을 읽었다. 남의 고통을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나보다 더 고통을 받는 사람을 보고서야 자신의 행복을 깨닫는다는 그런 이치(?) 때문에 나는 장편을 별로 선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흥미를 느끼며 읽었다. 그가 겪은 고통의 무게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나보다 클까, 적을까, 그가 이룩한 예술의 성과가 과연 그의 고통에 대한 진정한 대가인가... 

 인생의 낙오자, 이것이 그가 살았던 100여 년 전의 세상에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첫사랑에게서 ‘빨간 머리 등신이’라는 조소를 받은 뒤로도 그녀를 단념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교사가 되었다가 보조 설교사가 되었다가 전도사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성공한 것은 없다. 연수기간이 지나도 전도사로 임명되지 못하자 자비로 탄광 지대로 간다. 그리고 그곳 탄광지대에서의 여섯 달간의 임시 전도사생활- 그곳에서 그의 생활은 여느 성직자보다 뛰어난 헌신과 봉사의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병들어죽어 가는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은 엉뚱하게도 동료 성직자들에게 모함을 당해 봉급을 박탈당하는 지경에 이르른다. 게다가 탄광이 폭발하고 사람이 죽어나가도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인간능력의 한계를 느끼자 그는 결국 신을 떠나고 만다.

그는 또다시 실패의 꼬리표를 달고 고향으로 간다. 그리고 神性으로 향했던 열정을 그림에 쏟는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또 다른 사랑의 열정과 쓰디쓴 실패의 경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촌 케이에 대한 애정은 그의 왼손을 촛불에 태우는 물리적인 상처와 세상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는 정신적인 상처를 안고 고향을 떠나게 하고 만다.

그리고 헤이그에서의 생활, 창녀 크리스틴과 화가들과의 만남 속에 그림에 대한 그의 열망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만성적인 굶주림과의 싸움 속에 그의 생활이 익어간다. 제 손으로 생활비 한 번 제대로 벌어보지 못하고 동생 테오가 부쳐주는 돈으로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생활비도 없고 모델료도 없어서 그가 어느 화가(바이센부르후)에게 돈을 빌리러 가자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실력 또한 만만치 않은 그 화가는 결코 돈을 빌려줄 수 없다면서 그 이유를 피력한다.

“왜 당신은 내가 고생을 겪는 꼴을 그렇게 흥미 있게 보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게 자네를 진짜 화가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지.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넨 그 고통에 대해 더욱 감사해야 돼. 바로 그런 것들로부터 일급의 화가들이 만들어지는 걸세. 불행을 겪지 못한 인간에겐 아무 것도 그릴 게 없지. 행복이란 소처럼 아둔한 거야. 그런 건 소나 장사꾼한테나 어울리는 거지. 화가란 무성한 고통을 먹고 성장하는 거라구 자네가 굶주림과 낙심과 비참함에 시달린다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해. 신이 자네한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거니까.”

“가난은 사람을 망쳐 놓습니다.”

“물론 약한 자는 망쳐 놓지. 허지만 강한 자는 파멸시키지 못해. 가난이 자네를 망쳐놓을 수 있다면. 그건 자네가 약골이라는 뜻이니까 자넨  마땅히 꺾여질 수밖에.”

“그럼 당신은 날 돕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해 주지 않겠단 말입니까? ”

“자네가 고금을 통해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난 도와주지 않겠네. 굶주림과 고통에 의해 죽음을 당할 만한 인간이라면 애초에 구해줄 가치도 없는 걸세.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화가들이란 오직,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마칠 때까지는 신도 귀신도 죽일 수 없는 사람들뿐일세.”

“하지만 난 몇 년째 굶주려 왔습니다. 머리를 덮을 지붕 하나 없이, 거의 맨몸뚱이로 비와 눈 속을 헤매고 다녔지요, 병과 신열에 시달리면서, 버림받은 채 난 이제 그런 것들로부터 더 배울 게 없습니다”

“자넨 아직 고통의 표면만을 스쳤을 뿐이다. 자넨 이제 비로소 시작하는 사람이야. 내 말을 잘 들으라고, 이 세상에서 무한한 것은 오직 고통밖에 없어. 자 이제 집으로 달려가서 연필을 잡으라고 배고픔과 불행이 닥치면 닥칠수록 더욱 좋은 작품을 그리게 될 거야”


가끔 주변사람들에게 얄미움을 느낄 때가 있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아주 종종일 경우가 많다. 심장이 썩어 가는 사람 앞에서 손톱 밑의 가시가 너무 아프다고 죽어 넘어가는 시늉을 한다. 남의 고통은 당연히 그럴 이유가 있고 자신의 고통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부류도 있다. 그리고 자기네는 절대로 그런 것을 겪지 않을 것이며, 고통으로 땅바닥을 뒹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터무니없는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온 화가 바이센부르후는 참으로 묘한 사람이다. 손톱 밑의 가시가 아프다고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남의 고통을 보고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도 아니지만, 자신은 고통의 연금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순금의 예술혼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자부하고 있는 스타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실력이 그만큼 따라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해.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특히 나같이 I.Q가 딸리는 사람한테는...

책을 읽고 나서도 내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내 결핍감에 여러 가지를 더 추가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고흐에게는 테오 같은 동생이 있지만 내게는 없다. 고흐에게는 사랑한 경험도 있고 사랑 받은 경험도 있지만 내게는 없다. 고흐에게는 강한 집념이 있지만 내게는 없다. 고흐에게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열정이 있지만 내게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흐의 고통과 내 고통의 무게를 견줄 수 있을 만큼 나는 고흐와 등가를 이룰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이다. 감히... 감히?  그래 감히 나는 그를 들먹일 수 없는 하찮고 미미한 존재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Vincent]란 팝송을 틀어놓고 그 가사를 음미하는 것  뿐이리라.

            [Vincent]


별들이 반짝이는 밤, 청색과 회색으로

팔레트를 칠하십시오.

마음속에 숨겨진 어둠의 눈으로

여름날을 보십시오.

언덕의 그림자와 나무들

수선화를 스케치 해봅시다.

흰눈 쌓인 린넨의 대지를 칠합시다.

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정신으로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자유롭게 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알게 되겠지요

별들이 반짝이는 밤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꽃들과

자줏빛 안개에 휩싸인 뭉게구름

푸른, 빈센트의 눈에 반사되어

그 빛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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