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x월 x일
이이다 신 나까이 히사오 著
飯田 眞, 中井久父/이현수譯/1987년 5월 6刷/전파과학사
이 책의 부제는 -과학적 창조의 비밀- 이다. 저자인 이이다 신과 나까이 히사오는 일본인이고 둘 다 정신의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천재와 광기의 밀접한 관계에 관한 테마를 다루기 위해 뫼비우스의 병적학을 접근방법으로 삼았다.
병적학적 연구에는 여러 조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정신의학적 계보이고, 두 번째는 정신분석학적 방법이고, 세 번째는 직접 대상자와 인터뷰를 하고 심리 테스트를 해서 여러 그룹과 대비 연구를 하는 것이다.
과학자의 정신병리라는 주제는 우리를 과학자에 독자적인 문제성 속으로 인도한다. 과학자가 만든 세계의 특징과 기질과의 상관성을 밝히고, 과학자의 기질과 내적 갈등과의 관련, 즉 과학사 속에서의 과학과 과학자의 <만남>의 성격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종래의 병적학이 즐겨 다룬 예술가, 사상가의 세계가 주관적, 다의적인 비해 과학자가 만든 세계는 객관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명확하며 일의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창조성의 문제는 협조성이 풍부한 우울병권에 속하는 과학자의 병적 연구의 특유한 주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자에게만 관련되는 것일 뿐 곧 창조적 인간 전체에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은 못된다.)
-이상, 머리말 부분 임의대로 요약-
여기에서 다룬 인물은 아이적 뉴튼, 촬즈 다윈, 지그문트 프로이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닐스 보르, 노버트 위너 등이다. 그 중에서 내가 특히 흥미를 느낀 것은 비트겐슈타인이다. 이 책에서 연구된 과학자들은 분열병권과 조울병권으로 나뉘어지고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분열병권에 속해 있다 .
비트겐슈타인은 이른바 境界人인 아버지의 절대적 권위에 눌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다가 위로 세 형제가 자살을 하는 사건으로 인해 겨우 실업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있어 정교한 기계를 만들기도 하고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클라리넷을 불며 지휘자가 되려는 꿈도 키우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권위에 거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그가 물리학자가 될 결심을 하고 베를린 공대에서 물리학을 배우고 영국의 고층기상대에 들어가 鳶을 연구하기도 하고 제트엔진이나 프로펠러를 만들기도 한다. 그는 몇 개의 특허를 따기도 했지만 모두 중도 포기해 버린다. 그의 흥미는 한 군데 머무는 일이 없다. 프로펠러 연구는 유체역학으로, 유체역학은 응용수학으로 그리고 다시 순수수학으로, 수학기초론으로, 수리논리학으로 차례차례 쌓은 것들을 중도에서 포기하면서 옮아간다. 자기의 천직 즉 자기결정을 구하는 이 방황은 그 자신에게도 괴로운 것이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라쓸의 [수학의 원리]의 존재를 가르쳐 주었고 그는 라쓸의 제자가 된다. 그는 라쓸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빈발해서 라쓸에게 위협을 느끼게 한다.
드디어 그는 자립을 달성했다는 것을 느낀다. 압제적인 아버지에게 呪縛된 고전적인 분열병질인 소년이 지적 능력에 의존하여 자립을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분열병의 소질을 갖는 사람이 자립을 구할 때에는 <수직상승지향>이라고도 할 즉시적, 전면적, 초탈적 자립의 환상적 원망이 분출된다. 그것은 계층질서를 승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단계적으로 <승진>을 지향하는 조울병질인 사람의 자립인 경우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분열병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자립에의 시도는 특히 위기적이다. 그것은 그들의 좁은 세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폐성과 수동성을 전면적으로 철회하는 것을 의미하며 곧 그들의 세계전체의 위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열병의 소질을 갖는 사람이 자기의 삶의 위기를 국지화하는 능력이 부족하며 위기가 쉽게 전체화하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들은 자기의 세계를 보잘 것 없는 국지에서 구축하기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확대, 성숙시켜 갈 틈이 없다고 느낀다. 따라서 그의 세계전체에 걸쳐서 지금까지의 <猶豫>가 철회되면 그들은 즉시적, 전면적 자립을 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飛上>하려 한다. 비상을 주제로 하는 과학적 실천은 이를테면 삶의 비상의 등가물, 대체물이다. 실로 자주 분열병권의 과학자는 자기자신의 발전이나 성숙을 결정적으로 단념하고 문제를 물리학이나 수학이라는 초개인적인 지적 세계로 옮겨 지성의 힘에 의해서 항구적인 문제해결을 시도하려 한다. . . .
. . .
. . .
이상, 내가 이렇게 자기결정(자립)을 위한 비트겐슈타인의 긴 방황을 옮겨 적은 것은 마구잡이로 책을 읽다가 걸려든 이 책과, 함께 읽은 박재삼의 시집에서 동질성의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나를 자극하는 것은 나의 경우를 적절히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독서라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필요한 것은 아닐른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 학문과 일생은 문학적으로도 많은 흥미와 가치를 느끼게 해주고, 또 개인적인 취향으로도 맞는 인물이지만 그것을 표현하기엔 한이 없을 것 같다 지극히 적은 일부분으로나마 감상을 대신해본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 자립을 달성하기 힘든 사람들은 박재삼의 시를 읽고 시대를 막론한 동지가 많다는 것에 위로를 받으시기를...
나는 아직도
박재삼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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