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유서/박성원

푸른얼음 2007. 1. 4. 14:22
 


1998년 x월 x일

                        [유 서]

                        박성원作


거의 보름동안 달팽이가 껍데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불 속에만 들어가 있다가 외출을 했다. 그동안 숙제로 남겨 두었던 우체국 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해결을 본 것이다. 며칠동안 세수도 안 한 얼굴이라(이는 닦았음) 모자와 안경을 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하려다가 대신 루즈를 발라서 세수 한 것처럼 위장을 하고 나갔다.

나는 변장을 하는 것을 재미있어 한다. 학교 다닐 때에 했던 적성검사에서 ‘스파이’가 적성에 맞는다는 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 그런데 내 변장술이 신통치는 않은 모양이다. 얼마 전에 무슨 상패를 받는 행사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지하도 계단에서 올라오는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알고 보니 같이 상패를 받을 사람이었다. 그는 거의 8개월 전에 책에 나온, 반명함 크기의 내 사진을 보고 나를 알아 본 것이다.

나는 그때 너무나 신기했다. 나는 내 사진을 볼 때마다 의구심을 가졌었다. 사진 속의 나는 동일인물처럼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인상이 많이 다른 것이다. 심지어는 같은 날 찍은 사진도 전혀 달라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그가 옛날 사진을 한 번 보고 전혀 생면부지인 나를 알아볼 수 있다니...

기회가 없어 물어보진 못했지만 언젠간 꼭 한 번 묻고 싶은 말이다, 사진 속의 인물과 내가 어떻게 같아 보이느냐고. 그건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졌던 궁금증의 하나이기도 하다. 가끔 신문이나 거리의 벽보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볼 때,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진 한 장을 들고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장면을 볼 때, 나는 정말 궁금했다. 저렇게 사진을 한 번 보고 그 사람을 기억을 해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람들은 잘도 찾아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은 인정했지만, 내 경우엔 아무도 한 번 본 내 사진과 실물을 연결 지을 순 없을 걸,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런 의문을 그가 해결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었지? 정말 이상하다...(→삼천포)

우체국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빵 집에 들러 생크림 케이크를 한 조각 샀다. 그 동안 열병을 앓은 대가로 입안에 쓴 물이 괴어 음식을 억지로 넘겼었는데 갑자기 과일을 얹은 생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을 정도로 식욕이 생겼다. 나의 생리적 조건을 무시한 대가로 치른 신체적 고통은 아직 남아 있지만 어쨌든 먹는 즐거움마저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에 비감이 생긴다. 하루에 포도주 한 잔이면 족한 내 조건을 무시하고(나는 맥주도 못 마신다) 지난번에 포도주 반병을 마셔버렸더니 내 신체가 나를 욕보이고 있다. 그리고 덩달아 내 정신도 침체기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나는 조울병 증세가 있는 모양이다. 지금 나는 울증을 보내고 조증이 생기는 것 같다. 슬슬 무언가 읽을 것이 없나 찾는 중이다. 지난 번 [허난설헌의 연구]라는 책을 사러 책방에 갔다가 찾는 책이 없어서 대신 [기호학으로의 초대]라는 책을 샀었는데 지금 그것을 읽고 싶지는 않다. 소설이 읽고 싶다. 그러다가 눈에 띤 것이 디스켓이다. 그 속에는 무려 100여 편의 국내 단편소설들이 들어가 있다. 어느 교수가 보내 준 방대한(?) 자료 중의 일부분이다. 그 교수는 디스켓을 열 개나 보내면서 자신의 책도 보내주었는데 그 책에 사인을 넣으면서 이런 글도 썼다. 편지를 보낸 준 것에 대한 답례입니다... 그 교수는 내 편지를 일고 감동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또 그것이 이해가 안 간다. 별로 잘 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내 허물을 동정했는지도 모른다.

이러구러 나는 지금 그 교수께 감사한다. 생각해보면 의외로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늘 인복도 더럽게 없네, 라고 투덜거리지만 돌아보면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들도 꽤 있었다는 걸 기억한다. 내가 복이 없었던 건... 내가 욕심이 없었던 때문이고, 내가 욕심이 없었던 건 어쩌면 살 의욕이 없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온전히 삶 쪽에 있지 못하고 삶과 죽음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내 자신을 느낀다. 내가 카톨릭의 영세를 받았던 것도 자살이 대죄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에게 대죄를 짓지 않으려는 다짐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런 다짐도 짐스럽다. 내가 자살을 꿈꾸었던 그 시절, 나는 타고난 선견지명으로 지금의 이와 같은 삶을 예견하고 미리 죽음 쪽으로 다가섰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끔은 그때 죽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디스켓에서 출력해 낸 많은 소설들 가운데 이 [유서]라는 제목은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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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쓴 박성원이라는 작가는 생소하다. 나는 문학작품도 편식을 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은 까맣게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형적인 실존주의 소설로서 내 취향에 잘 맞는다. 사티로스 극을 모티브로 해서 겉으로는 쌍둥이 형제의 의식을 추구하고 있고 내면적으로는 저주와도 같은 시기심과 패배감에 때문에 파멸되는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다. (사티로스 극: 외디프스가 자기 눈을 찌른 뒤 방황의 길로 접어들고 나서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라는 두 아들이 1년씩 번갈아 가며 테베를 다스리기로 했는데 1년 간의 지배기간이 끝나도 형이 왕권을 내놓지 않자, 동생은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가서 전쟁을 일으킨다. 결국 두 형제는 서로의 칼에 서로가 찔린 채 피비린내 나는 9년간의 전쟁을 끝내게 된다.) 

외모가 똑같지만 9분 차이로 먼저 출생한 형의 의식으로 [유서]는 진행된다. 형이 갖고 싶은 세계를 먼저 갖고 있는 동생, 그러나 형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는 동생은 결코 자신의 재능을 내보이지 않는다. 시인이면서 화가이고 배우인, 만재능을 가진 동생은 자신의 재능이 상품화되는 것을 싫어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는 무서운 것이라며 자본주의는 사회주의까지 상품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노동절의 기획상품으로 마르크스나 레닌의 인형이 나올 수도 있다나?

동생은 온갖 예술활동을 통한 가치창조에 회의를 갖고 있다. (그 동생의 생각은 나와도 흡사하다.) 동생의 말을 적어보겠다.

-주어진 농간에 발맞추는 그런 것 나는 싫어. 인간이라는 게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면 시를 적겠지. 생존을 못하는데 생활을 한다? 시라는 게 원래 사치며 가진 자들의 장난이야 얼마나 많은 시인이랑 화가들이 배고파 죽어 갔는지 알아? 단지 당시의 비평가나 업자들의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명작들이 대접도 못 받고 사라져갔는지를 아냐구? 천재라는 것이 다 우연히 재수 있는 놈들을 말할 뿐이야. 당시 비평가들의 입맛에 맞으면 천재고 맞지 않으면 개수작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지 절대성이라는 것이 어디 존재할 것 같아?’

(화가의 예: [플란더즈의 개]에 나오는, 배고파 죽어간 네로 / 시인의 예: 영화 [넘버 3]에 나오는, 상품화된 호스티스 시인)

이런 동생의 말에 형은 다시 패배감을 느낀다. 동생은 만재능을 지배하지만 나는 시기심과 패배감에 지배를 당하고 있다고, 형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잣대 (상대적인)로 인정받고 싶은 형은 동생의 시로 세상에서 인정받는 시인이 되고 만다. 동생에게서 시를 받는 조건은 동생이 싫어하는 벌레를 잡아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벌레가 무엇을 상징하는 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독자가 유추 해석할만한 근거가 미약하다.)

상대적인 것보다 절대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동생은 절대적인 것 보다 상대적인 것에 몸달아 하는 형을 향해 죽음의 승부를 한다. 동생이 바라는 절대적인 것은 형의 사랑이다. 그러나 형은 상대적인 것, 즉 출세를 원한다. 형에게 있어 동생의 죽음은 그렇게 갖고 싶었던 동생의 재능을 명실공히 자신의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 벼랑 끝에 매달린 동생은 형과의 사랑으로 자신들의 관계가 구원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래서 절대적인 관계로 승화되기를 원하지만, 형은 동생을 향해 손을 내미는 대신 세상과의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 동생은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드디어 자신이 되고 싶었던 동생이 되어버린 형은 세상도 속이고, 동생의 애인도 속이고 살아간다. 그러나 동생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사십구일 간 그는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죽은 동생의 소리를 듣는다.

“형,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거야.”


이 작품은 두 형제를 등장시켜 카인과 아벨 그리고 외티프스의 두 아들 사이에 존재했을 법한 시기심이나 패배감을 분석하고 있는 듯 한데 뒤집어 보면 한 인간의 분열된 자아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심상들을 분열시켰다가 통합시키기도 하는 것은 작가만이 느낄 수 있는 재미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으니까.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내 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런 느낌은 없어졌지만 그걸 나는 엄마 뱃속에서 죽은 나의 쌍둥이 형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 이유는 아버지의 태몽 얘기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산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깎아지른 듯한 높은 벼랑에 핀 보라색 꽃을 보고 아버지께 저 꽃을 꺾어 달라고 하였단다. 아버지는 벼랑 끝에 올라가 절벽 중간쯤에 핀 보라색 꽃 두 송이를 엄마에게 꺾어 주었는데 엄마는 그 중에 한 송이는 버리고 한 송이만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들리는 내 마음속의 또 다른 목소리를 들을 때면, 그때 미처 인간이 되지 못한 내 형제의 목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짐작되는 또 한 가지가 있다. 이 작가는 분명 르 끌레지오의 [조서]나 [침묵]을 읽었던 것 같다. 왠지 그런 냄새가 난다. 어쨌든 이 작품을 읽으면서 오래간만에 작가와(아니면 작품과)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부르짖던 절대성이라든가 순수성이라는 말이 그렇게 유치찬란한 생각은 아니었구나 하는... 

나는 요즘 사방에서 바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돈이나 출세, 뭐 이런 것에 대한 욕심이 너무 없어서라나? 어떤 사람은 바보도 과분하고 구제불능의 정신적 허영끼가 있다나? 하긴 그런 말들을 한 사람들이 지금 다 출세하여 깃발 흔들며 다니고 있으니까 유구무언이다.

추악한 세상, 발붙일 곳이 없구나. 절대적인 것에 잊었던 그리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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