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왼손잡이 여인/피터 한트게

푸른얼음 2007. 1. 4. 14:18
 

1998년 x월 x일


                   [왼손잡이 여인]

                   피터 한트게/홍경호譯


“열망을 가지시오, 열망을...”

한때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는 것으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소설가 K씨가 내 손목을 잡아 흔들며 소리를 지른다. 그의 목소리엔 거의 절규에 가까운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아직도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애타는 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나는 눈물이 나올 것을 저어하며 눈을 내리깔고 냉랭하게 말했다.

“난 원래 열정이 없는 인간이에요.”

그러고는 국물이 다 졸아붙은 해물탕 냄비에서 새우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우리는 해물탕을 가운데 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열망과 열정은 다른 거요”

그는 나의 반응에 조금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그거지 뭐, 다를 게 뭐가 있다구. 아마 저 인간은 쇼를 하는 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나 같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려고 저렇게 애를 쓸 이유가 없잖아... 나는 새우를 아작아작 씹으면서, 내 판단을 확인하기 위해 갖고 있던 전자수첩 속의 한영사전을 탐색해보았다.

열망: 1)anxiousness 2) great hope

열정: 1)ferver 2) ardor 3) burning passion

순간 나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이미 붉어져 있긴 했다). 오랫동안 머리를 쓰지 않은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다니... 열망과 열정의 차이는 그게 그거가 아니라, 엄청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내게 great hope를 갖게 하려는데 반해 나는 그의 진심에다  burning passion이라는 저열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저열하다? 꼭 누군가가 돌을 던질 것 같은 기분). 나는 조금 머쓱해져서 부지런히 젓가락만 움직였다.

그의 원고를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잠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시절, 아웃사이더처럼 삶의 언저리에서 방황하는 나를 생의 한 가운데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쓴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의 (덤덤함)에 기가 질려 이제 모두 나를 돌려놔버렸다, 비웃음과 함께. 그런데 이 사람은 그들과 약간 다르다. 예기치 않은 끈질김으로 나를 회유하고 있다, 제발 열심히 살라고... 그러나 그의 끈질김은 짧은 순간 나를 미소 짓게도 했지만 한편으론 나를 속박하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알아채고 있다. 그의 끈질김은 단지 외로움 때문이라는 걸. 그래서 머지않아 그의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서 굴절되어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갈 것이라는 걸. 왜냐하면 내 심장은 예쁜 하트가 아니라 구멍이 숭숭 뚫린 못생긴 바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일기장에나 쓸 얘기를 이런 공간에다 옮겨놓는 것일까? 김영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마련한 공개된 일기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공개된 일기장은 거짓이다’(문장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만 뜻은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쨌거나 저쨌거나 간에 나는,

지금

정말

죽고 싶다.

사춘기 이후로 아니, 어쩌면 사고력이 생기기 시작한 그 전의 어느 때부터 나는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다보니 내 인생의 황금기는 애초부터 준비되지 않았던 것 같다.

죽음... 두통이 생긴다. 언젠가 내가 좋아한 적이 있는 한 사람(사랑이란 말을 붙여도 괜찮을)이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까지 한 번도 진짜로 웃어 본 적이 없지요?”

그때 나는 그가 그런 식의 질문을 한다는 것에 당황해서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혹시 이제 누가 다시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 해도 역시 나는 아무 말도 못할 것이다.  갑자기 그가 보고싶어 진다. 만일 그가  내 앞에 있다면 나는 그가 무슨 질문하기에 앞서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질 것이다. “너,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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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한트게: 1942년 오스트리아 출생. 24세 때 미국에서 열렸던 47그룹의 모임에서 그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47그릅의 와해를 가져오게한 장본인. 문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언어라는 문제에 그 시선을 돌려 그것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함. 단순한 착상과 의식의 내적인 공간만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시간이란 공간과 결부시켜서 현재, 과거, 미래를 한군데에 묶고 인간의 외면 세계와 내면 세계를 통일시키며 거기서 생겨나는 제2의 현실을 문학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문학의 표현 대상을 확대시켰다는 점에 그의 공로가 있다고 함.

                           

역자의 말: <왼손잡이 여인>은 공허로운 현대 생활에서 실존을 자각한 여인의 대명사이며 무엇으로도 그 고독을 팔아 넘기지 않는 여인의 표본이 되었다. (...) 주위에 맴도는 사람들 모두가 그녀로 하여금 함께 어울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여인은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독을 씹으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점차 생의 線이 뚜렷하게 아로새겨질 수가 있다. <왼손잡이 여인>은 타인들과 어울려 지하철을 타고 쇼핑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설거지를 하지만 언제나 홀로 존재하는 여인이다.


감상: 오정희의 [바람의 넋]이 생각남. <왼손잡이>여인이 남편과 스스로 헤어질 것을 결정하자 남편은 그녀의 행동을 하나의 (겨울)유행으로 생각하고, 여인의 친구조차 어떤 다른 남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왼손잡이>여인을 개인적 신비주의자로 치부하는 것이다.

[바람의 넋]에서도 주인공 은수의 남편이 은수에게 가출 이유를 묻자, 은수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그럴 때가 있어요. 그냥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사나, 사는 게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그러나 남편은 은수의 말을 치기 어린 감상벽 정도로 치부한다. 이렇듯 여성의 실존적 자각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치기의 범주 속에 가두어버리긴 마찬가지인가보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적인 차이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왼손잡이 여인]의 마리안느는 자신이 자각한 실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성공적이지만, [바람의 넋]의 은수는 아직도 방황이 끝나지 않은 고통스런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뿌리깊은 유교적 전통의 영향은 아닐는지...

<왼손잡이> 여인은 왼손을 주로 쓰는 인간이 아니라 소수의 반항적 기질을 가진 (인간)이며,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다. 장난처럼 이혼에 동의했던 남편이 아내와의 이혼이 장난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여인에게 말한다. “도대체 당신은 우리들이 남자와 여자라는 사실을 떠나서 우리들 사이에 무언가 따뜻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나지도 않아?”

혼자 사는데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여인은 고독과 주변의 몰이해에 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거울을 보며 혼자 떠들면서 자신을 단련시킨다.“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생각해라. 너희들이 나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나는 너희들로부터 자유로와질 것이다.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는 어떤 새로운 것이 그 즉시 벌써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 앞으로 누구인가 내 자신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그것이 아첨이든 용기를 일깨워주는 것이든 나는 그런 뻔뻔스러움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이 책을 읽다보면 나도 혹시 왼손잡이 여인에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또 다른 고독과 만난다. 그것은 왼손잡이라든가 오른손잡이, 혹은 양손잡이라고 이름 지어진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할 일종의 박탈감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밑줄을 그을 부분이 참 많다. 언어의 마술사라는 칭호답게, 또는 희곡작가로 출발한 이력답게 대사로 전달하는 심리묘사가 훌륭하다. 또한 활자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독자에게 시각적인 전달을 잘 해주고 있는 묘사 능력은 르 끌레지오를 생각나게도 한다. 애써 구분을 하자면 르 끌레지오는 바다 속의 심해를 그리는 것 같고 피터 한트게는 수면 위를 그리는 것 같은 느낌.

밑줄 그은 부분들의 몇 개 옮기고 싶다.

   

- “당신의 머리칼에서는 그냥 머리칼 냄새만 나는 것이 마음에 들어. 그건 냄새가 아니라 하나의 감정이 될 거야. 그리고 당신의 걸음걸이도 마음에 든단 말이야. 그건 여자들에게 흔히 있는 괴상스러운 걸음걸이가 아니야. 당신은 그저 걸을 뿐이니까. 그것이 아름다워.”

- “넌 도대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행복에 대한 욕구도 없단 말이니?”

“없어. 난 행복하고 싶지가 않아. 기껏 만족할 뿐이야, 난 행복이 두려워. 난 행복을 견뎌 내지 못할 것만 같아. 머릿속에서 말이야. 난 영원히 미치거나 죽고 말 거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살해할지도 모르지.”

- “당신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합니다. 마치 사람이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확고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 당신은 얼굴에 하나의 생명선을 갖고 있는 겁니다! 저는 당신을 향해 불탑니다. 나의 내부에 있는 온갖 것이 당신을 향해 탑니다.(...) 당신을 건드리기도 전에 당신으로부터 뿜어지는 열기를 감촉하고 싶습니다! 저를 비웃지는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당신을 열망하고 있는지, 당신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

- “혼자라는 것은 차디차고 구역질나는 고통을 유발해요. 말하자면 무의지의 고통이지요. 그렇게 되면 사람이 완전히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줄 사람들이 필요해요.”

- “제발 나를 넣고 어떤 계획을 세우지는 마세요.”


최근에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 한다. 그들 모두가 [왼손잡이 여인]의 범주에 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만일 그 숫자가 늘어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왼손잡이가 아닐 것이다. 왼손잡이에는 다수에게 배척받는 소수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이 말은 이혼율의 급증을 두려워하는 말이기도 하고, 왼손잡이의 진정한 의미가 희석되는 것을 우려하는 말이기도 하다. 

                                                        


1998년 x년 x일                


                 [상징적 카르마]

                 지나 서미나라의 [윤회]와 칼 융의 [무의식 연구]


가끔, 아니 아주 종종 나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내 삶의 형태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갈매기 [조나단]처럼 비상을 못하고 뱃전에서 먹이를 쪼아먹는 여느 갈매기처럼 살아야 하는지 그것도 두발을 묶인 상태로...

십 수년 전엔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닫고자 직지사 주변의 암자에서 묵은 적도 있었다. 처음엔 머리를 깎을 작정을 하고 갔으나 결국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 물에 머리를 감고 머리카락 끝엔 고드름을 매단 채 황악산에 올라 산꼭대기에 있는 눈벌에 꽃발자국을 찍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심산유곡에서 도를 닦는 것보다 속세에서 수도를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 어려운 거야, 하는 내 나름의 변명을 만들어가며...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언제 비상을 꿈꾸었던가 하는 몽롱함 속에 내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다. 주변에서 “너는 이렇게 살 애(?)가 아니었어”하는 말을 듣는 것도 이젠 형벌이다. 취미 삼아 손금을 보거나 사주를 본다는 친구들도 “이해가 안돼. 손금도, 관상도, 사주도 좋은데 왜 그렇게 사는지”하고 의아해 한다.

하여 나는 삼라만상의 법칙을 깨닫기보다는 내 삶의 패턴에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과연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일까,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등등.

몇 년 전 어떤 무당은 내게 꿈을 자주 꾸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다, 라고 대답했더니, 그 꿈속에서 전에 알던 남자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다시 묻는다. 역시 그렇다라고 했더니 무당 왈, 내가 전생에 산신령이었고 꿈에 나타난 그 사람들 역시 산신령이 사람 모습으로 변해서 내게 무언가 알려주려고 나타났다나?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알 수 없는 것은 꿈에 나타난 그 산신령들께서 내게 무엇을 말해주려 했는지 모른다는 거다 나는 아마 머리가 나빠서 인간세계로 쫓겨난 산신령은 아니었는지...  (믿거나 말거나)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책은 지나 서미나라의 [윤회]라는 책과 칼 융의 [무의식 연구]이다.

[윤회]는 기독교인이던 케이시라는 사람이 우연히 자기최면 상태에 들어가 타인의 전생을 읽어내고 병을 치료하게 된 사례들을 모은 것인데 그 중에서 <상징적 카르마>에 관한 부분이 내겐 흥미로웠다.

-정신신체의학인 ‘기관언어’사이에는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상징적 카르마의 경우는 그 사람의 의식 속에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죄악감이 아주 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그 죄악감이 육체에 투영된다고 할까? 아무튼 그것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때 희생되는 기관은 상징적으로 적적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선택되는 것 같다.

-케이시의 파일 속에는 이와 같은 상징적인 보복을 보여주는 많은 예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것을 들어본다. 심한 천식 환자에게는 이런 말이 주어졌다. “제 목숨이 짓눌리는 것 같을 때는 당신이 남의 목숨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귀머거리인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주어졌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당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어떤 척수염 환자는 이런 말을 들었다. “이 사람은 남을 방해했기 때문에 지금 자기 자신이 그 꼴을 당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2세 때 아우가 생기고 나서 야뇨증이 생겼다. 부모들은 부모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긴 것에 대한 반발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으나 야뇨증은 10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부모들은 케이시를 만났고 리딩을 의뢰했다. 아이의 전생은 청교도 시대 복음 전도사였고 마녀 혐의자를 걸상에 묶어 연못에 쳐넣는 형벌을 적극적으로 집행했다는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밤마다 아이의 침상에서 ”당신은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하고 속삭였다. 그리고 아이의 증상은 사라졌다. 아이는 현생에서 누구도 해치지를 않았지만 그의 마음의 어떤 층에서는 과거에 남에게 가한 무자비한 형벌의 기억이 끈질기게 이어져 있어, 아직도 자신이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을지, 또 그것을 남들이 알아줄지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칼 융의 [무의식 연구]를 보면 묘하게도 맥이 닿는 부분이 있다 융의 무의식에 대한 개념은 프로이드의 잠재의식과는 다르다. 잠재의식은 단지 억압된 욕망들이 들어 있는 일종의 쓰레기 서랍이고 무의식은 의식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삶에 필수적이고 현실적인 일부를 이루는 세계이며 에고가 “깊이 생각하는 세계”이며 프로이트의 잠재의식보다 무한히 더 넓고 풍부한 세계다 무의식의 언어와 ‘사람’은 상징이며 의사소통 수단은 꿈이다.

-금세기가 시작되기 전 프로이트와 요제프 브로이어는 신경증의 증상들-히스테리, 통증의 어떤 유형들, 비정상적 행동- 이 사실상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런 증상들은 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정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어떤 환자는 침을 삼키려고 할 때마다 경련을 일으킬 수도 있다. 환자는 “그 상황을 삼킬 수 없는”것이다. 비슷한 심리적 스트레스의 상태에서 두 번째 환자는 천식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는 ‘공기(분위기라는 뜻도 있음)를 편하게 숨쉴 수 없는“것이다. 세 번째 환자는 특이한 다리 마비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는 걸을 수가 없다, 즉 ”그는 더 이상 갈 수(계속 지탱한다는 뜻이 있음)없는“것이다. 네 번째 환자는 먹을 때 토한다. 어떤 불쾌한 사실을 ”소화할 수 없는’것이다. 이러한 신체적 반응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자유연상이란 기법에서 멀어지고 ‘아니마’, ‘아니무스’라는 선의 구조를 채용했으며 무의식 속의 과거와 미래 부분에서 잠복기억, 감추어진 기억이란 흥미 있는 기술을 많이 하고 있다.

이쯤에서 갑작스럽지만 나는 글쓰기를 마치고 싶다. 한 컵의 모젠 데비드가 나를 잠들게 하고 있다. 내가 이 생에서 나의 카르마를 밝혀낸들 무엇하랴, 그렇다고 내 업이 사라지진 않을 텐데.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 싫은 생을 살아내야 한다는 건 더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무얼 발견하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긴 하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책과 음악과 영화 여행 등 이런 것들에 아직 마음을 둘 수 있는 내 정신적 여유이다. 누구나 그럴 수는 없을 테니까. 딮 퍼플의 April을 들으면서 잠이나 자야겠다. 아니 이번엔 브라질풍의 바하 5번을 들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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