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x월 x일
윤흥길/{한국소설문학대계}중에서/동아출판사/1995년 초판
새삼스레 3년 전에 TV에서 본 [애수(Waterloo bridge)]가 기억난다. 나는 세 번째 보는 그 영화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흑백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인물의 환상적인 표정과 안개가 자욱한 워터루 다리, 그리고 여주인공을 가혹하게 몰고 갔던 운명의 교차점 등등. 그러나 그것보다도 기억에 새로운 것은 <로이> 대위가 여주인공 <마이라>에게 했던 말이다.
<로이>대위는 행복한 사랑의 감흥 가운데에서도 문득 느껴지는 생소함을 연인 <마이라>에게서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패배 주의자’ ‘감상주의자’라는 표현을 했다. 그는 자신처럼 행복을 만끽하지 못하는 그녀가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나는 그때 문득 깨달았다. 그녀에게 패배주의적 성향이 없었다면 그녀의 운명은 훨씬 좋은 쪽으로 쉽게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윤흥길의 [꿈꾸는 자의 나성]에도 그러한 패배주의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허름한 옷차림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후미진 뒷골목 다방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L.A행 비행기편을 묻고 다니는 <그>와 직장 상사인 <손대리>이다. 화자인 <나>는 ‘반면교사’라는 일본의 경구처럼 남의 잘못 된 점을 보며 자신의 잘못됨을 깨닫는 관찰자인 셈이다.
작중에서 화자인<나>는 <손대리>에게 강렬한 분노와 반발을 느끼고 있다. <손대리>는 같은 방 동료들 간에 묵계가 되어있는, 예를 들면 번차례로 점심과 커피 값을 내는 것의 순번을 교묘하게 피해 갈 뿐만 아니라 틈 만 나면 수첩에 무엇인가 꼼꼼히 적은 행위로 보여주어 쩨쩨함과 불안감을 안겨주는 사람이다. 동료들은 <손대리>가 수첩에 적는 것이 사원 개개인의 근무동태랄지 비정상적인 사생활에 관한 정보를 적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작중 화자인 <나>의 선배가 좌천되고 그 자리를 <손대리>가 승진하여 <손과장>이 되자 선배의 송별회 자리에서 <손과장>의 본색을 밝혀내기 위한 쇼가 벌어진다. 그러나 그들이 밝혀 낸 것은 <손과장>의 쩨쩨함과 무고가 아니라, 속은 곪아터지면서도 겉으로는 의젓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는 ‘사나이다운 진짜 자존심’이었다. <손과장>에게는 심장병으로 오래 고생하는 부인이 있어 퇴근길에 직접 시장을 봐야했기 때문에 수첩에 가계부를 썼던 것이었고, 부인의 병치레로 집을 팔아야 될 만큼 가계가 쪼들려서 남들처럼 점심 값이다, 차 값이다 하는 것의 지출을 피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화자인 <나>는 여전히 <손과장>에게 분노와 반발을 느끼고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자기 자존심을 마구 휘둘러 마치 길바닥에 슬그머니 돈지갑을 떨어뜨림으로써 지나가는 사람을 공연히 도둑으로 만들듯이, 자신으로 하여금 두고두고 죄책감에 허덕이게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한편 찬바람이 부는 가을에도 여전히 철지난 여름옷을 입고 다니며 L.A행 비행기편을 묻고 다니는 <그>는 다방에서 엽차만 시켜먹다가 가는 곳마다 쫓겨난다. 생존싸움에 실패하고 한국 땅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판단되는 <그>의 불행한 모습에 대해 <나>는 호사가적인 궁금증과 연민의 정 때문에 그를 추적해나간다. 그는 낙오자이면서 몽상가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가 <그>를 만나려는 이유는 순전히 ‘이 세상에 낙원이란 게 어디 따로 있을라구요’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말은 <그>가 가고 싶어하는 이상향(L.A)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고 바로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렵게 <그>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이 소설의 주제가 밝혀진다. <그>는 <나>를 만나 에인젤피시에 대한 얘기를 한다.
- 에인젤피시... 이름이나 생김새가 그럴 듯하지요. 그야말로 천사처럼 착하고 우아한 몸으로 기품 있게 움직이는 놈입니다. 허지만 이름하고는 달라서 사실은 아주 불행한 놈이지요. 녀석의 불행은 성품이 너무 착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모양은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바로 그 모양이란 것이 생존에 방해가 될 때는 그걸 과감히 버려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저놈은 여전히 제 몸뚱이보다 큰 지느러미를 치렁치렁 달고 다니면서 그걸로도 모자라서 끝에다 기다란 끈까지 거느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 없어도 무방한, 오히려 없는 편이 생존에 훨씬 더 유리할 거추장스런 장식물들은 굶주린 적들한테 제법 식욕을 돋우는 좋은 표적이 되곤 합니다. 적한테 쫓길 때는 또 불필요한 그 장식들 때문에 동작이 마냥 굼뜨고 게을러져서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있을 때나 천사지 이 혼탁하고 잡박한 생존의 전쟁터에 내려오면 에인젤피시도 볼장 다 보는 겁니다. 악마가 아니고 천사이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우리가 사는 곳은 천사들이 사는 하늘나라가 아니다. 그곳은 어디까지나 이상향일 뿐이다. 이 잡박한 세상에서 살아내려면 생존에 방해가 되는 큰 지느러미와 거추장스런 장식물 따윈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다. 우아하고 기품 있게 보이는 큰 지느러미와 장식물은 <손대리>에rps 없어야 될 자존심이고 <그>에게 있어선 패배를 건너 뛸 구름다리이며, <마이라>에게 있어서는 ‘양심’일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 에인젤피시였던 것이다. 그들은 천사의 날개 같은 지느러미와 장식물들을 떼어내지 못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이 다른 점도 있다. 영화 속의 <마이라>는 아름다운 지느러미를 떼어내지 못해 죽음을 택했고 소설 속의 <그>는 L.A(이상향)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생존의 싸움터)로 돌아간다. 거추장스러운 지느러미를 떼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손대리>... <손대리> 역시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상처 입은 지느러미를 그대로 달고서.
10년이 지난 (‘87년 작품임) 이 작품을 다시 손에 잡은 것은 나에게서 <손대리>의 쩨쩨함과 <그>의 몽상과 그리고 <마이라>의 비극적 양심이 두루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의 모임에도 입만 갖고 나가 식사와 차를 얻어먹었고 또 지난주의 다른 모임에는 칵테일과 저녁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또 다른 만남에서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런 나를 생각할 때 나는 하루빨리 거추장스러운 지느러미와 장식물을 떼어내고 싶다. 그러나 아직 내게는 돌아가야 할만한 고향이 없다. 그리고 지느러미를 떼어낸 나를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 에인젤피시이고 싶다, <마이라>처럼 언젠가 날아가 버릴 충동을 품고 있는.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역시 옛날 작품들이 좋다는 거다. 세월을 뛰어넘어서도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래된 포도주의 맛과 향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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