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x월 x일
잉게보르크 바하만 /차경아 옮김/ 청하/ ‘86년 1쇄/ ’92년 8쇄 발행
바하만을 처음 만나 것은 몇 년 전 어느 모임에서 작품 품평회를 가질 때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완성한 어줍잖은 소설을 내놓았었는데, 교수님이 내 글을 보고 ‘바하만의 [삼십세]가가 생각나는군’ 하셨었다. 표정을 보니 칭찬 쪽으로의 의미가 강했다. 모임에 신참인 나로서는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임의 멤버들은 표정이 과히 좋지 않았다. 모임에 2년 이상이나 참여했던 자신들의 작품은 속된 말로 왕창 깨지고 난 후였기 때문이다. 딱 그일 때문은 아니더라도 나는 그 후로 그 모임에 몇 번 나가다가 그만두었다. 개인사정도 있었고 분위기가 왠지 나를 내모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도 생존의 문제가 나를 압박했기 때문에 글쓰는 일이 흐지부지 물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거기에서 내가 얻은 소득은 바하만이란 이름이었다. 나는 [삼십세]를 읽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교수님이 내 글에서 [삼십세]를 연결할 수 있었는 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삼십세]에 비하면 내 글은 ‘피발의 새’였으니까. 억지로 연결점을 찾아본다면 아마도 주제에 관한 관심이나 취향 정도가 아니었는지...
바하만은 전후 독일 문단에서 활동한 소설가, 철학자로도 유명하며 법률, 음악, 등도 공부한 여류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바하만은 50년대 독일어권 문단에 등장하여 많은 사람의 애정과 기대를 받았고, 마치 스타와 같은 화려함을 누리다가 퇴장까지도 센세이셔널하게 매스컴을 장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후광 때문에 정작 그녀는 작품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았고 또 사후에도 역시 작품이 진지하게 평가되지 못 했다고 한다.
바하만은 당대의 희생물이었던 셈이다. 50년 대 독일 문단은 종전 후의 공백을 메울 <메시아>적 존재로서의 시인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작품 속에서 외치는 悲鳴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바하만 자체를 하나의 영상이나 신화로 만들어버렸다, 라고 하인리히 뵐이 그녀의 조사에서 말했을 정도이다. 문학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대중의 입맛대로 형상화되는 자기를 보는 것 또한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남의 입맛대로 내 자신이 정의되는 경우를 무지무지하게 싫어한다.)
바하만은 20년의 작품활동 기간 중 두 권의 시집과 몇 편의 방송극과 단편집, 오페라 대본 그리고 장편소설 한 권이라고 한다. 이 [소금과 빵]은 제1시집 [유예된 시간]과 제2시집 [큰 곰좌에의 부름]을 합한 것으로 보인다.
[소금과 빵], 표제나 표지화에서 모두 굳은 빵을 씹으며 고행을 하는 성자가 느껴진다. 바하만에게 있어 빵의 의미는 <깨어있는 자>의 필수적 수행요건으로 의미지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인간들이 선호하는 <크림>처럼 맛있는 美食이 아니라 <빵과 같은 시>를 쓰기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빵과 같은 시? 이 빵은 이빨 사이로 어적거리고 씹히면서 배고픔을 다시 상기시켜 준 연후에야, 그 배고픔을 가라앉혀 줍니다. 이 시는 잠든 인간을 흔들어 깨울 수 있기 위해, 인식에 의해 예리해져야 하며 동경에 대해 준열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다시 읽어보는 바하만의 빵과 같은 시에 소화불량이 생기는 중이다. 소설에서는 좋은 인상을 주었었는데 시는 역시 어렵다. 주석을 읽어보지 않으면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전에는 느끼지 못 했는데 이제 와서 이해가 불가능한 불편한 시로 변해 버린 것은 시대가 변한 탓일까, 아니면 내가 변한 탓일까. 예전에 내가 썼던 두어 편의 시가 관념적이란 이유로 마구 두둘겨 맞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시의 은유를 이해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라고 속으로 그들을 일축했었는데, 지독한 상징과 은유로 쓰여진 바하만의 시를 보니 그들의 비난이 이해가 된다. 물론 번역시이기 때문에 시의 내재율이나 상징들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탓도 배제할 순 없지만 굳은 빵을 억지로 씹어 넘겨야 하는 행위가 이제 나에겐 특별한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제 크림 같이 맛있고 소화가 잘 된다는 음식도 싫다. 나는 모든 것에 소화불량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제 아무 것에도(사람이나, 예술) 더 이상 느낌표나 물음표가 생기지 않을 만큼 나의 모든 감각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어쩌면 내가 다가올 겨울을 살아 남기 위해 면역력을 키우려는 행위와 같다. 이를테면 방어본능 같은 ...
나는 마치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는 환자처럼 무위한 시간을 음미하고 있다. 지난 주 내내 백조(백수의 여성형)가 되어 방안을 뒹굴면서 나는 자꾸 내가 살아온 날들의 허허로움을 반추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살았는지, 왜 살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내가 이제껏 살아 온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정말 알 수 없다.
나는 정말 이번 겨울이 무섭다. 저 겨울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혹독함이 나는 무섭다. 긴 겨울 끝에 어떤 가공할 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 존재를 말살시킬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소금과 빵
지금 바람은 선로를 선발시킨다.
우리는 서서히 행진하며 뒤따라가
이 섬들에 살게 될 것이다.
서로서로 신뢰하면서.
나의 백년지기의 손에 내 직분을
되돌려주니, 이제 비의 사나이가
내 어두운 집을 관리하며, 내가 점점
집에 머물지 않은 이래, 줄그어 놓은
외상장부의 부채를 메꾸고 있다.
그대는 백열처럼 흰 예복을 입고,
추방당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선인장들의 살에서 가시를 하나 뽑아낸다
__속절없이 우리를 굴복시키는,
무력의 징표를.
. . .
. . .
하여 나는, 바다가 우리를 향해 밀려오면,
소금을 채취하여
돌아와
문지방에 소금을 놓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우리는 한덩이 빵을 비와 공유하고 있다.
같은 빵, 같은 부채와 같은 집을.
*소금은 예수가 그 제자를 소금으로 일컬은 이래 정화와 자기 보존력의 의미에다 말을 완성시키는 양념의 의미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라틴교 의식에서는 소금이 번갯불을 끄는 힘이 있다고 믿어 뇌우가 올 때 성수와 함께 소금을 불에 뿌려 이를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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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밖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Rainpeople의 전설을 누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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