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쉰다섯 통의 편지로 된 소설/도스토예브스키

푸른얼음 2007. 1. 4. 14:14
 

1998년 x년 x일

    

[쉰다섯 통의 편지로 된 소설]

도스토에프스키/김민수역


얼마 전에 문단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젊은 작가와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이십대 초반에 등단해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며 확실한 자기 색깔을 갖고 있는 그는 가끔 외도를 하기도 한다. 추리소설도 써보고 동화도 써보고 연애소설이란 것에도 손을 댔다. 그런데 그는 모처럼 시도했던 연애소설이 실패한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진짜 연애소설을 다시 한 번 쓰고 싶단다. 그래서 나는 연애 소설의 전형을 어떤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세가지를 들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좁은 문],[폭풍의 언덕] 등이다. 그런데 이 책(도스토에프스키의)을 읽고나니 나는 거기에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쉰다섯 통의 편지로 된 소설]을 추가하고 싶어진다.

책방에서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 나는 표지에 써 있는 글을 읽고 눈물이 글썽해졌다.

 -‘원고를 낭독하느라 밤을 꼬박 세운 시인 네크라소프와 그리고로비치는 주인공 마까르와 바르바라가 이별하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 다 울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두 사람의 폐부를 깊이 도려내는 것 같았던 것이다.’... 

내게 눈물을 글썽이게 했던 단어가 ‘눈물’ 그 자체였는지 ‘이별’이었는지 혹은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나는 EQ지수가 넘쳐서 실수를 자주 하는 사람이니까.

도스토에프스키의 처녀작인 이 소설은 그가 24세 되던 해에 발표되었고 ‘새로운 고골리의의 출현’이라는 찬사를 받았단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하다. 몰락한 가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시고 나자 고아가 돼버린 가엾은 처녀 바르바라, 그리고 그 처녀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대머리 하급관리, 마까르. 그들의 사랑은 오 헨리의 [크리마스 선물]보다 더 눈물겹고 아름다운 절대성을 느끼게 한다. 절대 고독과 절대 가난 속에서 자기 자신보다 상대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그들의 사랑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고 욕정은 더욱 아니다. 어쩌면 절망에서 뽑아 낸 자기 전존재의 확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도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신이 인간에게 불어넣어 준 영혼’에 대한 사랑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기의 단 한 벌뿐인 외투를 팔아 여자의 코트를 사주고 자기는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벌벌 떨며 다닐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래도 그 대머리 마까르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따뜻하게 지낼 것을 생각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책을 전철 속에서만 이틀에 걸쳐 다 읽었다. 간혹 눈물이 나와서 주변사람 보기가 약간은 부끄러워질 만큼 그들의 사랑은 순수했고 아름다웠다. 다이아몬드 같이 빛나는 사랑이 아니라 수정 같이 맑은 사랑의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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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  매일 죽는 여자


오늘 나는 죽기 위한 외출을 했었다.

근 보름동안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해 방안에서 나를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술과 수면제, 목욕물과 면도날, 굵은 동아줄, 무색 무취의 비소, 그리고 거품이 생기는 청산가리... 그것들은 적막한 방안의 햇빛 속을 떠다니며 나를 유혹하다가 맥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가 오늘 누군가가 전화로 나를 불러낸 것이다.

“오늘 날씨 너무 좋다. 뭐해요?” 앤서링 머신 속에서 튀어나온 그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나는 그 목소리가 계속 이어질지 끊어질지를 잠시 점쳐 보았다. 저 여자는 약간 수다과(科에) 속해서 쉽게 전화를 끊지는 않을 것이다.

집에 있으면서도 나는 직접 전화를 받지 않는다. 자동응답기에 거짓 부재를 녹음 해 놓고 그것을 즐긴다. “저는 지금 외출 중입니다. 메시지를 남겨 주시면 꼭 연락 드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목소리는 되도록 애교스럽게 꾸며놓았다. 나는 애교라는 단어를 구역질이 날 만큼 싫어하지만 상대가 전화를 끊지 않게 하기 위한 전략으로 한 발 양보한 것이다.

“밖으로 나와요 갑갑한데, 한강에 바람이나 쐬러 가자구” 기계 속의 목소리는 내가 집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여자의 확신에 보답하는 의미로 외출을 결심했다. 한강에서 죽었다는 사람도 없진 않으니까.

나는 미니 스커트와 검정 색 부츠와 빨간 코트를 걸쳤다. 그것들은 내 기분을 감추기에 충분하다. 날씨는 정말 좋았다. 이월의 날씨가 사월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강은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되어서 예전보다 가기 편했고, 약속한 사람을 만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강물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푸른색으로 맑게 빛났다.

 여의나루역에서 만난 그 여자는 나보다 키가 크고 등뼈도 꼿꼿해서 내가 팔짱을 끼기에 딱 좋았다. 나는 그 여자의 팔짱을 끼고 물살이 부드럽게 밀리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언제였던가? 아주 오래 전,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드나들며 뱀의 혓소리를 내던 겨울, 나는 모래를 밟으며 강물 가까이로 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강물은 탁한 녹색이었고, 주변엔 사람의 그림자라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모래가 조금씩 젖고 있는 물가에 서서 내가 신고 있는 부츠가 젖어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엇에 홀린 것처럼 한 걸음씩 강물로 걸어들어 갔다. 강물이 부츠의 꼭대기까지 닿았을 때쯤 멀리 강둑에 있는 나무들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안개처럼 희미한 형체의 사람을 잠깐 쳐다보다가 그만 발 밑의 철사 줄에 발목을 잡혀버렸다. 물 속의 땅 밑에 단단히 박혀있던 철사 줄은 내 발목을 감고 놓아주질 않았다. 나는 비로소 공포를 느꼈다. 사람살려, 사람살려, 나는 차츰 뚜렷해지는 사람의 모습을 향해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내 목소리가 제대로 터져 나왔었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나질 않는다. 

“요즘 꼼짝도 않고 뭐 했어요” 옆의 여자는 의외로 여러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심어주는 여자다. 아르바이트하다 만난 여자인데 유난히 열심히 사는 것 같다. 살림도 잘 하고 요리도 잘 하고 자식농사도 훌륭하다. 그 여자가 즐겨하는 스포츠가 있는데 그 스포츠는 이른바 사교춤이다. 엘리트에 속하는 여자의 가족들은 그 여자가 그런 스포츠를 즐기는 걸 모른다.

“먹고, 자고... 뭐 그런 단순한 것들만... 뭘 해야 좋을지 몰라서...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를...”

“자긴 연애도 잘 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살아? 사람 좀 구해 봐.”

“난 별로 아는 사람 없어, 어쩌다 만나도 한두 번이면 쫑이야.”

“자긴 마음을 열지 않는 게 흠이야. 너무 차가워.”

“마음을 여는 것도 마음이 동해야지, 왜 억지로 해야 돼? 최소한 내 마음 하나 만은 철저히 내 것이어야 되는 거 아냐?”

“하이구, 순진한 건지, 인색한 건지 모르겠다니까.”

여자는 벌써 컵라면을 다 먹고 뚜껑을 덮는다. 나는 아직 반이나 남은 라면을 천천히 휘젓는다. 먹을까, 버릴까를 생각하면서. 저 여자는 뭐든지 빠르다. 생에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는 걸 싫어한다. 저 여자는 바쁘게 뛰어다니지만 나는 슬슬 걷는다. 왜 뛰어야 하는지, 왜 이겨야 하는 지를 모르기 때문에.

여자는 가방 속에서 호일에 싼 떡과 비스켓을 꺼낸다. 내가 배가 부르다고 하니까 나중에 먹으라고 억지로 내 가방에 집어넣는다. 나는 조금 신기하게 그 여자를 바라본다. 난 저래 본 적이 없는데...

우리는 컵라면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걷기로 했다. 바지를 입은 여자와 내가 팔짱을 끼고 강변을 걷자 벤치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 둘이 쳐다보며 웃고, 조금 더 지나자 남자 둘이 유심히 오래 쳐다본다. 그때야 우리는 그 여자애들이 왜 웃었나를 깨달았다.      “우리가 레즈비언쯤 되는 줄 아나 봐.”  여자가 가볍게 웃는다.

“원래 개 눈엔 개만 보이고,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인다잖아?”

나도 덩달아 웃는다. 호모이든 레즈비언이든 나는 그들의 삶에 대한 의지가 부럽다. 아니, 신기하다. 

“우린 살기 위해 태어난 걸까, 죽기 위해 태어난 걸까?”

“개똥철학 그만 해!”

맥없는 내 목소리에 비해 여자의 일침은 매섭고 어른스럽다.

“난, 혼자 사는 여자들 보면 이해가 안 가. 세상은 순리대로 사는 게 좋아. 남편과 아이들이 없으면 내 인생은 생각할 수도 없어.”

나는 그 여자의 가족들 보다 그 여자의 확신에 찬 표정이 부럽다. 자기에 관해서는 무조건으로 확신할 수 있는 무모함과 슬기로움을. 나도 지지 않을세라 내 생각을 조그맣게 말해본다.

“그래도 혼자인 게 편한 사람도 있어. 호모도 있고, 레즈도 있듯이.”

“그래서? 그렇게 편해서 늘 그런 쓸쓸한 표정이야?”

“가끔 활짝 필 때도 있어. 니체의 시에 이런 내용이 있지. 언제나 눈을 감고 졸고 있는 황금 용이 있는데, 그 용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만났을 때만 눈이 활짝 떠진다는 내용이었어. 기억이 확실친 않지만...”

“니체가 뭐 하는 물건이야? 난 그런 것엔 흥미 없어. 그리고 세상에 진정한 사랑은 없어. 그런 거 찾을 시간 있으면 간단하게 스포츠나 하는 게 더 현실적이지.”

나는 더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우린 너무 다르다. 다른 대로 그렇게 살고 있다. 자기 생에 확신을 가진 사람과 아무런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함께 섞여서... 다행히 우리는 얼굴에 아직 웃음기가 남은 상태에서 식당 배가 있는 노들나루에 닿았다. 그리고 그때 그 여자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가 전화를 하는 동안 식당 배에 앉아 메뉴를 들여다보았다. 랍스터 요리도 있다. 예전에 어떤 인간은 내가 랍스터를 사 달라고 한 다음부터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다. 아마 무척 가난한 처지였던 것 같다.  그는 내가 자신의 가난에 모욕을 준 것으로 생각했나보다. 어쩌면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의 가난을 이해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본다. 가난이란 만인 앞에서 발가벗길 때처럼 치욕스러운 것이다 . 

“내일 시간 어때?”

통화를 끝낸 여자가 웃음기를 흘리며 앞자리에 앉았다.

“고향 친구들끼리 만나서 생선회에 소주라도 먹자고 하는데 낄 용의 있어?”

“아... 난, 술도 못 먹고 그리고 어디를 돌아다닐 만한 차비도 없어.”

“잘 났다. 돈 없는 자리를 자존심으로 다 메웠나 보구나. 그러고도 멋쟁이로 보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워. 그래도 별일 없으면 나와 봐. 사람은 서로 만나 즐기라고 있는 거야.”

“그래도 아무나 만나기 싫어...”

“아유 알았어. 어쨌든 우리 이제 슬슬 일어납시다. 사실 오늘 우리 아들 생일이거든. 그 애 좋아하는 거 해 주게 일찍 들어가 시장을 봐야겠어.”

여자는 서둘러 나를 일으켰다. 그리고 전철역으로 가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팔짱을 끼었다. 아늑하지도 않고 불편했다.

“다음에 또 만나요”

“그래요. 좋은 일 있으면 또 연락하고, 오늘 즐거웠어요.”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존댓말을 하며 서로 반대편 집찰구로 들어갔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오늘 내가 외출했던 이유를 생각해 내었다. 아, 죽을 장소, 내지는 죽을 방법, 죽을 이유 같은 걸 생각해 내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지금은 너무 피곤하다. 그런 것들은 내일 다시 생각할 거야. 내일 역시 나를 자극하는 아무런 사람도 없고, 나를 감동케 하는 아무런 일도 없을 터이니...

나는 옷을 벗자마자 칠순의 어머니가 아들 몰래 퍼준 보약을 꿀에 타서 입에 넣는다. 그리고 컴퓨터를 부팅하고 cd롬에 [Out of Africa]를 집어넣은 다음 일기를 쓰는 디스켓을 A드라이브에 집어넣는다. 일기의 내용은 비슷할 때가 많다. 그래서 한동안 일기를 안 쓰기도 했는데 그것마저도 손을 놓고 있으니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런데 그깟 것이 왜 중요하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럴 땐 자신에게 ‘그냥 하는 거지 뭐’ 하고 말해 준다.

 Out of Africa의 Main Title 곡이 방안 가득히 퍼진다.  한땐 죽기 전에 아프리카에 내 농장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꿈도 있었지만 이젠 그런 꿈을 꾸었던 내가 우습다. 그래도 그닥 우습지 않은 것 한 가지는 남아 있다.  로버트 레드포드(외모가 아닌 극중 인물의 성격) 같은 사람을 만나 죽기 전에 그런 사랑의 기억쯤을 하나 만들어야 되질 않을까 하는 바람.. 이런 바람은 아까 만났던 그 여자의 탓일까? 어쨌든 이런 생각도 몇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고 나는 또 습관처럼 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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