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x년 x일
오강석(동아일보사진취재기자)/1996년 7월/호영
철저히 혼자가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멀쩡한 부모형제 속에서 마치 고독이 내 전유물인양 청승을 떨어 왔지만 그래도 이제껏 살아오는 날들엔 세상 속에 합류해보려는 몸부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부질없게 느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결국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운명을 피하면서 운명에 대한 그리움으로’라는 릴케의 시구처럼 나는 언제나 ‘무엇’을 피했고, 피했던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았다. 그 ‘무엇’은 이른바 사랑인 적도 있었고 명예인 적도 있었고 물질인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나를 두고 교만해서...,라고도 하고 정성이 없어서..., 라고도 하고 멍청해서..., 라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남들과 다른 지를 알 수 없다. 내가 깨달은 것은 더 이상 남들과 같으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변화하기 힘들다면 그저 세상 밖에서 세상 속을 들여다보는 고답적인 재미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나는 가끔 내가 어느 별에서 잘 못 떨어진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런 느낌은 허난설헌이 어렸을 때 지은 시의 내용과 맥락이 같을 수도 있다. 난설헌의 시 중에는 자신이 하늘나라에서 살다가 실수를 해서 지상으로 떨어진 사람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한다(제목은 모름, 혹시 닭살 돋는 사람이 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시길...). 어쨌든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휴먼 릴레이션스? 그래, 잘난 사람들이나 해라. 자기 합리화의 바탕 위에 엄청난 욕망의 탑을 쌓고 그 위에서 실컨 휘파람을 불어라. 나는 나의 길을 찾으려니...
그러나 나의 길 찾기는 너무 더디다. 미망 속에서 헤매는 나의 더듬이는 너무 무디다. 한 번의 가출(비구니가 되려고)과 세 번의 자살 시도로도 나는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나의 길을 찾지 못했다. 내 자유의지는 번번이 싸구려 감상주의나 왜곡된 낭만주의로 치부될 뿐이었다. 우습게도 이십대초반에 치렀던 행사들은 ‘실연’이라는 꼬리를 달고 그냥 묻혀졌을 뿐이다. 사실 실연이란 가당치도 않은 표현이었다. 그때 나는 아무에게도 연정을 품을 가슴이 없었다. 내가 상대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었고 광대한 우주였다. 내가 욕심 낸 것은 마음이 아니라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살고 있는 것은 포기가 빠른 나의 처세술 때문이다. ‘섭리’에 대한 화두를 풀어내지 못한 나는 욕심을 버렸고, ‘~을 향한 의지’도 사라졌다. 내가 무엇을 원해야될지를 알지를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착하다고도 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한다. 이해할 수 없다? 그래, 나는 이 말을 처음 엄마한테 들었다. 언젠가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넌... 내가 내 뱃속에서 너를 낳았는데도 이해할 수가 없어.’라고.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영화 [비트]에서 들었던 ‘니나 잘 해!’라는 말처럼 약간은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지난주에는 모 소설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대학 강사로, 논술교사로, 바쁘게 사는 열정적인 인물이다. 그 사람은, 사람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는 가장 큰 지혜는 바로 ‘인간관계’라고 강조했다. 그래, 눈물겹게 그리운 그 인간관계 그러나 순수성이 결여된 인간관계는 어디까지나 세상에 아부하는 것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인관관계는 비지니스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나처럼 순수성, 어쩌구 하는 사람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연애도 결혼도 비즈니스이고, 공부도 비지니스이고 예술도 문학도 다 비지니스가 깔려야 빛을 본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그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사람들이 그런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 것 아니냐고 누구는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맞는 말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들보다 아름답다. 순수는 영원과 통하는 것이고 순수한 개인주의(이기적인 개인주의는 차별/개인=이기가 아님)는 이기적인 집단주의보다 몇백 배 우월하다. 순수한 개인은 사고력을 낳지만 집단은 투쟁의지를 낳는다. 투쟁의지는 곧 생존경쟁, 약육강식을 대표하는 말이고 완곡한 표현의 비지니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인의 고독을 무서워하다가 집단에 들어가고 그 집단에서 개인을 처형한다. 비지니스 때문에...
=====================================================
[아... 사하라]는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사진첩이다.
1995년 가을, 기아자동차와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행해졌던 7개월간의 사하라횡단 기록사진집이다. 챠량팀(스포티지)과 도보팀으로 나누어,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길고긴 8,600킬로미터 여정을 마친 모험과 의지의 기록이다. 극지 탐험가 최종열이 도보팀을 이끌었고 그 외 지질학 교수와 사진기자, 다큐멘다리 제작팀이 차량 팀에 속했었다.
1996년 여름, 나는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사하라횡단팀의 사진전시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더운 여름날에 그곳을 찾아갔다. 전철역에서 멀리 떨어진 백화점이라 구경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던 기억도 난다.
그즈음 사하라는 내가 쓰려던 글의 주제였기 때문에 나는 ‘사하라’라는 말만 들어가면 자료를 모으려고 애썼다. 도서관에서 책도 찾아보고 비디오점에서도 사하라와 연관 된 내용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대부분은 전쟁이나 sex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내가 구하고자 했던 것은 전통이나 사막을 살아가는 정신, 혹은 신화 같은 것이었다. KBS에서 아침 뉴스 시간에 지구촌 무슨 여행이란 쓸만한 프로가 있었는데 간혹 베두윈 족의 이야기가 나와서 녹화해 둔 것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그것을 정리하기도 전에 실수로 중요한 부분이 지워져버렸다.(나는 자주 얼간이 같은 짓을 한다. 얼마 전엔 공룡에 관한 자료를 공을 들여 디스켓에 저장해 놓았었는데 프린터로 빼보려고 했더니 디스켓이 손상되어서 읽을 수가 없다나? 왜 이러지? 머피의 법칙 일까?)
하여간 나는 그곳에 가서 희한한 것을 보았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를 가져와, 전시장에 깔아놓고 그 위에 텐트를 치고 그곳 생활에서 사용했던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물론 대형 사진들도 걸려 있었고, 사진 전시회였으니까. 그런데 기억이 확실치는 않는데 그 사막의 모래를 팔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라면 양해바람. 요즘 치매현상이 있는 듯 해서 ...)
아무려나 나는 이 사진첩을 거금 2만원이나 주고 샀는데 후회는 하지 않는다.
사진첩에 있는 사막(자연)은 역시 아름답다. 에르그가 사막의 누드 같다는 표현이 적절하게 느껴질 만큼 아름답다. 그곳에서 홀로 (처음엔 두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사정상 귀국했다 한다.) 사막을 횡단하는 최종열 대장의 절대고독을 상상해 본다. 아무나 그런 고독을 경험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최대장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사막의 영웅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오밥 나무,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가 그곳에 있었다. 혹성에 있던 바오밥나무였는데... 그러고보니 사막은 처음부터 사막이 아니었다. 사하라에는 풍부한 강물이 흘렀고 티라노사우르스보다 더 큰 공룡의 화석과 거북, 갑각류의 화석도 발견될 만큼 여기저기 강이 발달한 범람원이었으며 강의 주변에는 침엽수가 드리워져 있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이동으로 생긴 지형의 흔적이라고도 한다.
사하라 사막: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제일 큰 사막
Sahara라는 이름은 사막을 가리키는 아랍어의 sahra에서 유래.
사하라는 모로코,알제리,튀니지,이집트,리미아,모리타니,말리,니제르챠드,수단,그리고 모로코의 서부 사하라 등 11개 국가에 걸쳐 발달하여 있다.
사하라 사막이라고 하면 끝없이 펼쳐진 모래벌판을 연상하게 된다. 사하라 사막의 서부는 대체로 이러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이와 같이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지역을 에르그(erg)라고 하는데 그 분포범위는 매우 방대하다. 에르그에는 높이가 1백에서 2백30M에 이르는 이동하는 모래구릉이 발달하여 있으며, 가장 큰 것은 알제리에 있는 Grand Erg Occidental과 Grand Erg Oriental으로 각기 5만 1천제곱 킬로미터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사하라사막의 전체에서 본다면 이러한 모래사막은 약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
몸이 너무 피곤하고 힘이 든다. 다시 한 번 사막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보며 대리만족을 끝내야겠다.
아,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나는 아직 사하라 사막을 주제로 한 소설을 한 줄로 쓰지 못했음을 밝힌다. 너무 늦어버렸다. 다른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긴 비애를 삼키며...
'Reading desk 98'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쉰다섯 통의 편지로 된 소설/도스토예브스키 (0) | 2007.01.04 |
---|---|
잃어버린 정사/프레데릭 달 (0) | 2007.01.04 |
물의 역사/알레브 크루티어 (0) | 2007.01.04 |
사평역/임철우 (0) | 2007.01.04 |
인간에 관하여/장그르니에 (0) | 2007.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