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잃어버린 정사/프레데릭 달

푸른얼음 2007. 1. 4. 14:12
 


1998년 x월 x일


          [잃어버린 정사] 

         프레데릭 달/ 프랑스 미스테리 걸작 선 中/명지사/1993년 7월/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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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뻐기는 사람 투성이다. 잘난 것을 과시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하는 것 같다. 왜 자기 잘난 것을 남에게 평가받기 위해 안달을 하는 것일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내 자신이 잘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인연을 무척 까다롭게 생각하는 내게 그나마 친구(?)라고 손쉽게 표현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최근에 두 사람이나 그 잘난 문인이라는 칭호를 달더니 태도들이 달라지고 있다.  전에는 선배대접을 해주려고 갖은 아양을 떨고 애를 쓰더니 이젠 3년이나 제대로 된 글 한 줄 못 쓰고 있는 나를 뭣 취급하고 있다.

엊그제 있었던 모임에서는 강남에 산다는 한 여자가 내게 사는 지역을 묻더니 내 대답을 듣고는 금방 눈길을 피하기 시작한다. 그 여자의 태도에는 그 사람이 사는 지역이 그의 인격과 가치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전에 들었던 남의 얘기가 생각난다. 강남에 살고 있는 어떤 여자(소설 공모 당선금을 많이 탄 작가임)의 딸에게 중매를 서려던 사람이 상대 남자에 대해 설명을 하였는데 얘기를 다 듣고 난 다음 ‘그 사람이 어디 살아요?’하고 묻더란다. 그래서 강북에 산다고 했더니 ‘그 사람 목욕이나 제대로 하고 살아요?(그 곳은 제대로 된 욕실도 없는 곳이라는 표정으로)’하고 묻더란다. 무게 있는 사람한테 들은 얘기인데도 믿겨지지 않는 일화였다. 

내가 친구를 찾았던 것은 연강홀에서 있을 로브 그리에의 영화축제를 함께 보러가자고 하기 위해서였다. 평소에 혼자 밥 먹고 혼자 영화보고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긴 해도 이번 행사는 무료라는 딱지가 붙어 있어 줄이 엄청나게 길텐데 그 긴 시간을 혼자 서서 기다리지는 못 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또 몇 년 전에 연강홀에서 영화학도들을 위한 영화 축제가 있을 때도 그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 본 ‘바그다드 카페’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아직도 곱씹을 맛이 나는 좋은 영화였다.

어쨌든 나는 그 친구를 만나서 아무 얘기도 못했다. 아니, 영화에 관한 얘기를 못했다는 것이다. 답답하고 무거운 내 일신상의 얘기를 듣는 그 친구의 태도는 예전과 달랐다. 허긴 이제 짜증날 때도 됐을  것이다. 나도 그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제 마치 바이센브르흐가 고호한테 하듯 말한다.

“아직 배가 덜 고프셔.”

“나르시즘에 빠져서...”

“화끈하게 연애를 해보면 어때요?”

“얼마동안 증발해버리는 건 어때요?”

그 친구는 늪에 빠진 사람이 살기 위해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더 깊이 빠져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 마음껏 나를 야유해라. 발목에 매인 끈만 풀리면 나도 단번에 멀리 날아갈 수 있을테니. 그러나 그 친구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쉽게 날지 못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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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정사]는 1956년 프랑스 추리소설대상을 수상했던 작품이다. 프레데릭 달은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신문사에 들어가 광고부에서 일을 하다가 영화기사를 쓴 것이 계기가 되어 희곡과 시나리오 그리고 미스테리를 썼다고 한다.

추리소설은 흔히 문학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추리소설의 제 1요건은 오락이므로 재미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리소설의 전개 방식도 보통 소설과는 다르다. 일반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흔히 기승전결의 네 단계 혹은 다섯 단계로 나뉘어지고 있는데 추리소설은 그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를테면 결말 부분을 앞으로 빼서 거꾸로 추적해가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반 소설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나 갈등에 대한 복선을 깔면서 설명해 나가다가 무리 없이 사건을 발생시켜야 하는데 추리 소설은 사건부터 발생시킨 다음 동기를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철학이나 문학성을 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사건의 발단 부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추리 소설은 흥미나 오락에 치중을 하다보니 ~성을 상실하기가 쉽다.

그러나 [잃어버린 정사]는 추리소설의 정석을 따르지 않고 있다. 아가사크리스티가 추리소설의 정석을 무시한 것과는 또 다르다. 두 사람이 추리 소설의 전개방식을 파괴한 것은 같지만 ~성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아가사크리스티의 작품에는 대중성이 있지만 프레데릭 달에게는 문학성이 있다. 트릭도 없고 탐정도 없고 아이디어가 없다는 것은 차지해 두고서라도 이 작품에서는 순문학이 추구하고 있는 선악의 갈등과 사랑에 관한 본질이 심리묘사를 통해 무리 없이 표현되어 있다. 비교하자면 장정일과 김영하의 차이점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성에 관한 소설에서 장정일과 김영하의 접근방식은 사뭇 다르다. 장정일이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중성을 닮았다면 김영하는 프레데릭 달의 문학성을 닮았다. (억지가 있었다면 양해 바람. 장정일의 작품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여러 장르에서 장정일의 문학성을 엿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작품의 줄거리는 화가 다니엘이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한 여인을 자동차에 치게 되면서 시작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여인, 마리안느가 그의 자동차에 뛰어든 것이다. 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이는 여인은 아무런 외상없이 기억상실증만 갖게 된다. 신분을 확인할 것이라고는 자동차에 뛰어들 때에 갖고 있었던 바이얼린 뿐이었고 그것마저도 차바퀴에 깔려 부서져버렸다 (여기에서 바이얼린은 그녀의 희망이나 이상향을 상징하는 소품이다). 매우 아름다운 그녀에게 연정을 느끼는 다니엘, 화가인 그는 마리안느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그림 속의 그녀의 눈에서 어떤 눈빛을 느낀다. 이를테면 살기 같은 것이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묘사된 그녀의 눈빛에 그는 언뜻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는 누구일까?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궁금증을 느끼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의사는 그녀의 기억상실증이 자동차와의 충격 때문이 아니라 신경증 적인 장애나 혹은 사고로 인해 유발된 마음의 혼돈 상태가 주원인이라고 말한다. 마음의 혼돈 상태... 그녀는 다니엘에게 호소한다.

“내가 누구인가 알고 싶은 생각이 없어. 어느 날엔가 당신이 나를 떠나야 된다면 다니엘, 그 전에 날 죽여줘.” 

다니엘은 화가로서의 성공대신 사랑하는 그녀와의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이름이 없는 그녀의 여권을 마련하기 위해 나선 여행길에 그는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알콜중독자인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그녀. 어머니는 호구지책의 방편으로 부자 노인을 끌어들여 함께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어머니는 발작을 일으켜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만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어린 그녀... 노인은 계속해서 그 집에 드나들고 그녀는 임신을 한다. 바이얼린만이 그녀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러나 그녀가 바이얼린을 켤 때마다 이층에서 방해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기의 울음소리와 구역질나는 노인의 잠자리 요구, 그녀는 탈출을 꿈꾼다. 칼로 노인을 찌르고, 방치해둔 아기는 굶어죽고, 그녀는 바이얼린 케이스를 가슴에 품고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 스페인을 향해 길을 떠난다.

이 사실을 확인한 다니엘은 그녀와 함께 도피하기 위해 짐을 꾸린다. 아직도 과거를 상기하지 못하는 그녀, 그러나 도피생활 중에 가끔씩 과거를 기억해내는 그녀에게 그는 문득 불안을 느낀다. 뒤이어 살인용의자로 신문에 실린 그녀 사진이 실리고 형사들이 급파된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또다시 그녀와 함께 도망을 치려했지만 이젠 과거의 기억 속에 한 발 빠져든 그녀를 발견하고는 그녀를 부지깽이로 내려친다. 사랑하는 그녀를 왜곡된 사회의 제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살아나고 그 타격으로 다시 과거를 찾은 그녀는 이젠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마리안느를 향해 외친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늘 당신을 사랑할 거야. 마리안느 당신을 기다릴 테야. ”

그리고 마지막 문장 - 베르사이유에는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화살모양의 두 마리 제비가 푸른 하늘로 서로 쫓으며 날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들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덧붙이는 나의 한숨 소리 - ‘아, 나는 언제 다니엘 같은 사람을 만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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