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x년 x일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윤희기/예문1997년7월
드디어 2주일 간의 아르바이트가 끝났다. 내일 또 하루 일거리가 생겼지만 아침에 일찍 나가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그 동안 아침잠을 못 자서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오늘 일이 끝나고 생일 선물을 살 일이 있어 압구정동에 있는 백화점에 들렀다. 늘 그곳에서 전철을 탔지만 백화점에 가기는 처음이었다. 시간도 없었고 목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백화점 안은 어느 곳엘 가든 사람이 끓었다. 이곳은 불경기도 안 타는 모양이다. 추석 밑이라서 만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物神이 머물기를 좋아하는 동네라서 그런가 보다. 그런데 물건들은 생각했던 것만큼 좋아 보이지가 않는다.
선물로는 역시 책이 좋을 것 같아 책방으로 갔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도 물신이 안주하는 것을 보았다. 베스트 셀런가, 신간 코너인가 하는 곳엔 요즘 TV에서 잘 팔리고 있는 여자들이 쓴 책들로 판을 치고 있었다. 책표지엔 한결같이 자신들의 얼굴로 대문짝 만하게 장식하고 내가 이렇게 출세하여 당당하고 신나게 살고있노라고 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나처럼 해 보라 요렇게~ 나처럼 해 보라 요렇게~’하며 꼬리를 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둘레엔 여러 사람이 열심히 책을 고르고 있었다. 또 그 옆에는 돈을 어떻게 하면 잘 버는가에 대하여 쓴 책들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도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불경기 탓인지 물신이 오래 머물러 있는 곳이어서 인지를 잘 모르겠다.
나는 선물할 책으로는 [마음을 열어주는 ...]을 사고, 내가 읽을 만한 책을 고르기 위해 구석진 서가를 뒤졌다. 다자이오사무의 [인간실격], 뒤라스의 [고통].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등을 사려고 골랐다가 다시 꽂아놓고 [물의 역사]를 사기로 했다. 나머지 것은 도서관에서 빌려 볼 요량이다. 나는 소설 종류는 대부분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샀으면 좋겠지만 주머니 사정 때문이다(작가들이 엄청 욕하겠네). 그러나 오래 두고 참고할 만한 것들은 돈을 주고 사는 수밖에...
그리고 책을 산 뒤에는 빈약한 음반코너를 구경하다가 <바그다드 카페>를 발견하고는 얼른 그것을 골랐다. 그런데 막 돌아서려는 찰나에 <샤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바그다드>를 놓고 다시 <샤인>을 집었다. I`m colling you 보다는 소팽의 ‘빗방을 전주곡’과 라흐마니노프 3번을 더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라흐’는 1번과 2번을 갖고 있기 때문에 3번으로 구색을 맞추고 싶었다. 나는 이상하게 신경증 환자의 곡을 좋아하는 것 같다. 라흐도 그렇고 차이코프스키도 그렇고 신경증 환자여서 치료를 받았던 전적이 있다던데...
영화 [샤인]은 지난겨울 영화관에서 볼 때 너무 많이 울었던 작품이다. 그냥 목이 메어서 흑흑 느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 음악을 틀어놓고 표지에 있는 영화 장면을 보니 또다시 눈물이 난다. 목욕을 하다가(물장난이던가?) 발가벗은 몸에 구겨진 자켓 하나만 걸치고 아이들이 노는 덤블링(트램블린)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점프하는 데이빗 헬프갓, 그의 표정은 천상의 음악소리라도 듣는 듯하다. 그때 나온 음악이 비발디의 Nulla in Mundo Pas Sincera,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라는 곡이다. 데이비드와 질리안의 ‘사랑의 주제’라고도 할 이 곡은 소프라노 제인 에드워드의 목소리와 또 하프쉬코드 그리고 첼로의 선율이 순수하고 맑은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곡이다. 그런데 나는 그만 스테레오가 고장나서 음질이 천상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음질로 듣고 있다. 공연히 용산에서 수입품을 사는 바람에 오디오 A/S도 못 받고 그냥 견디는 중이다.
책도 샀고 음반도 샀고 그리고 내려오다가 포도주도 샀다. 수입품 레드와인을 누가 선물로 준 것을 다 먹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국산 마주왕 레드도 좋다고하여 그것을 샀는데 아이고! 콜크 마개를 따는데 엄청 애를 먹었다. 맥가이버 칼에 있는 것을 다 동원해서 끙끙거렸지만 자꾸 부숴지기만 하는 것이다. 전에 어느 망년회 모임에서 샴페인을 터트리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 영광을 나한데 넘긴다며 누가 내게 샴페인을 건네주었는데 세상에! 내가 그런 것을 해 봤어야지... 병 주둥이에 있는 철사줄(?)만 잡아당기며 끙끙대다가 슬그머니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 일도 있다. 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물의 역사]는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거의 읽었다.
1899년 그려진 [카라칼라의 목욕탕]이라는 그림이 표지로 되어있어 고풍스우면서도 화려하고 한편으로는 사치스럽게도 느껴지는데 그래도 자기 얼굴을 표지에 넣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
{카리칼라의 목욕탕]의 소재가 된 로마시대엔 목욕문화가 발달하여 웅장한 시설에다 예술적인 건축과 조각미까지 가미되어있다. 게다가 내부에는 도서관, 화랑, 김나지움뿐 아니라 갖가지 종류의 오락시설들이 있고 대리석 좌석이 설치된 1,600명 수용 규모의 스타디움도 있었다고 하니 그들에게 있어 목욕이란 확실히 정신적, 사회적, 의학적 가치를 두루 갖춘 현실적이면서 예술적인 행사였는가 보다. 로마시대의 목욕탕 건물은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대규모 홀인 엑세드라로 통하게 되어있었다고 하니 목욕이 그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문화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책을 읽기는 쉬웠다. 그림으로 많이 채워져 있어 볼거리도 많고 다방면에서 물의 본질과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 반면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깊이는 모자란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수박 겉핥기 식은 아니었지만 실제 내용보다 차례에 나와있는 소제목의 표현이 너무 멋있다(?)라는 쪽이 맞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책의 원제가 taking the water인데 특별히 모자랄 것도 없겠다.
소제들이 어떤 것인가를 적어보겠다.
제1장 물의 정신: 1. 신화 속을 흐르는 물
2. 물에 관한 의식
3. 항해와 모험
4. 강과 홍수에 관한 신화
5. 성스러운 샘물과 水源
제2장 목욕의 정신: 1. 목욕의 역사
2. 유럽의 온천
3. 생수 문화
제3장 예술에 나타난 물의 모티브: 1. 미술 속의 물
2. 연극.영화.문학 속의 물
3.음악 속의 물, 그리고 물의 형태
소제에서 내가 너무 많을 것을 바랐던 것만 아니라면 이 책은 다방면에서 충분히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지금 생각하니 내 불만의 근원을 알 것 같다. 이 책은 그러니까 연구를 한 것보다는 취재를 한 것에 가까워서인가보다, 이를테면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수집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자기자신의 생각을 가정법으로 쓰면 안된다던데...)
2, 지하철 에피소드:
전철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데 누가 무릎 위에 껌을 놓고 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당하는 일이라 계속 눈을 감고 있는데 양쪽 옆에 앉은 사람들이 껌 살 돈을 꺼내는지 동시에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부스럭거린다. 그래도 계속 눈을 안 뜨고 있는데 잠시 후에 오른쪽 옆에서 누가 나를 툭툭 친다. 눈을 떠보니 먹물은 좀 덜 들어 보이지만 깔끔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껌을 한 개 내민다. “이 거 드세요” 나는 황당해서 손을 내젓는다. “난, 껌 안 먹어요, 아니 나도 껌 있어요” “드세요, 방금 샀어요” 그래도 막무가내로 내미는 남자. 나는 계속 싫다고 하다가 문득 앞을 보니 건너편 좌석에 앉은 열네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주시하고 있니 않은가? 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껌을 받고 손에 쥐고 있다가 에라 모르겠다,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다시 눈을 감는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껌을 마구 씹어본다. 전철생활 십 몇 년에 별 희한한 일을 겪네... 하다가 잠깐 눈을 뜨니 옆의 남자가 열심히 나를 보고 있다. 내 오른 손목에 있는 팔찌하며( 2년 전에 정신세계사에서 샀던 수정팔지), 바지 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내 다리를 슬쩍슬쩍 보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내 바지는 무릎 밑에서 아래까지 길게 터져 있어서 전철 연결 통로에서 부는 바람에 나풀거리는 중이다. ‘별일이네, 싫컨 봐라. 죽으면 썩어질놈의 살. 니 살이나, 내 살이나... 오늘따라 전철은 왜 이렇게 기어가는 거야’ 계속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뜨니, 아니? 앞좌석은 사람들은 다 내려서 텅 비고 내가 앉은 곳에도 내 양옆에 사람들만 남아 있는 것이다. ‘가만있자 내 옆에 붙어 있는 두 남녀는 혹시 2인조 소매치기 아닐까? 인상은 소매치기 같진 않은데... 근데 왜 자리가 넓은데 꼭 붙어 앉은 거야?’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앞을 노려본다. 옆의 남자는 무얼 생각했는지 벌떡 일어나 바람에 신문이 펄럭이고 있는 다른 자리로 옮겨 신문을 본다. ‘휴~ 다행이다. 공연히 신경소모만 했네. 멍청한 소매치기가 아닌 다음에야 돈 없는 사람을 찍을라구’ 그리고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오는데 어라, 이 친구가 어느새 내 옆에 있네. 집찰구를 빠져나오자 그는 내게 다가와서 친숙한 양 미소를 띠고 묻는다. “집이 어디세요?”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경질 적으로 쏘아붙인다 “그건 알아 뭣해요?” 그런데 그는 나보다 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것이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약간의 술 냄새와 고기 냄새가 남아 있다. 아마도 돼지불고기에 소주 반병 정도 했음직한 냄새다. 소매치기가 술을 먹진 않았을 테고, 그럼 뭐야, 나하고 연애하자는 거였어? 기가 막혀 겨우 껌 하나에? 나 아직 그렇게 시시한 사람 아니야. 나는 저만큼 사라진 그의 뒤통수에 대고 크게 눈을 흘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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