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인간에 관하여/장그르니에

푸른얼음 2007. 1. 4. 14:07
 


1998년 x월 x일


               [인간에 관하여]

              장 그르니에/윤혜주/청하


장 그르니에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좋아했던 두 사람의 작품을 통해서이다. 한 사람은 카뮈이고 다른 한 사람은 국내 작가인 오정희 씨이다. 카뮈는 어느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나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에게 바칩니다’ 라고 했고 오정희 씨는 소설이 아닌 어느 잡문(?)에서 ‘장 그르니에의 아름다운 산문을 읽으며...’라는 표현을 했다. 이 두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던 차에 장 그르니에 전집이 출간 중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가 1991년도였던가? 처음엔 [어느 개의 죽음에 관하여]를 샀고 얼마 후엔 [일상적인 삶]을 샀다. 그리고 [섬]은 도서관에서 읽었고 이 책 [인간에 관하여]는 1994년에 샀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장 그르니에의 산문이 내겐 아름답지 않았다는 것이다. 철학적인 주제와 은근한 문제 제기, 독특한 접근방법 등 내가 선호하는 여러 가지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 이유를 나는 내가 카뮈도 아니고 오정희도 아닌 필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덮었다.

[어느 개의 죽음...]과 [일상적인 삶]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인간에 관하여]는 정말 내 짧은 지식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어린이 유괴사건으로 인해 선악에 대한 명제를 머리 속에 굴리고 있었는데 ‘선악의 피안’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다. [선악의 피안]? 아 그거 니체 거였지. 그러고서 책이 있을 법한 곳을 뒤져보았지만 찾는 책은 없고 이 책이 나왔다. 다시 몇 장 읽어보다가 나는 내가 어렵게 생각했던 것이 순전히 내 무지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p20의 중간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이제 우리 자신을 검토하면서 인간이 어떤 문명에서 우연히 태어났건 간에, 그처럼 위험이 가득하고 짧은 생을 살아 나가는 인간의 비참한 조건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예를 들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고 걱정해 마지않는 이 비참한 존재를 측은하게 여기게 됩니다.” 또 p44를 보면 이런 귀절도 나온다. “앙시엥 레짐 이래로 프랑스 문화는 이제 더 이상 쓸 용도를 찾아내지 못하는 능력의 행사와, 결코 제기되지 않을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로 이끌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인류는 아마도 언제나 무용지물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문장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으로나마 불어를 번역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실력을 운운할 수는 없다. 다만 내 무지가 100%는 아니고 한 90%는 되겠구나 하는 자위를 할 수 있다는 것 뿐...

그르니에의 이 작품 속에는 매우 흥미 있는 주제가 많이 들어있다. 특히 중간 부분에 <무관심의 시도들>을 보면 그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아름다운 산문으로 접근한 것 같이 느껴진다(프로이드와 사르트르를 마스터하지 못했으므로 가정법을 씀). 그는 무관심의 형태를 여섯 가지로 구별했다. 1.무감각에 의한 무관심  2.이기주의에 의한 무관심  3.공정함에 의한 무관심  4.희망에 의한 무관심  5.절망에 의한 무관심  6. 흥미상실에 의한 무관심 등이다. 

각각을 요약해 보는 대신에 결론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인간은 한 가지 차이에 입각해서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존 및 가치 체계가 배열이 되는 그러한 차이에 집착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고, 해서도 안 된다’(???이해시킬 자신이 없음).  

‘실존은 불가피하게 엄격하다. 그리고 실존의 위대함은 무한정으로 파헤쳐진 엄밀함에서 기인한다. 이 위대함은 가장 강한 집착의 내부에, 가문 좋은 사람 누구에게나 그의 허무감에서 나오는 그러한 초연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초연한 태도는 결국 그가 균형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 [미치광이들]의 한 인물이 스타브로긴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동물적인 관능성으로 가득 찬 보잘것없는 방탕과 인류를 위해 자기 피를 흘리는 것이 목적인 사람이 세우는 수훈 사이에서 아무런 美의 차이도 보지 못한다고 단언했다는 게 사실입니가?”([미치광이들]은 도스토에프스키의 [악령]으로 사려됨).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문구를 발견함.

<완전한 무관심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전폭적인 동의를 하게 한다. 무관심한 사람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관심한 사람이 취하는 제스처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 용이다. 참된 무관심에는 거부의 동작인 묵인의 표시가 없다.> 무관심이 존재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 문제인가? 무관심은 열의가 없는 것에 대한 가면일 뿐이다. 여리고 우유부단한 성격의 사람은 아무 것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기자신도 중요하지 않다고 쉽게 믿어 버린다. 벤자민 꽁스탕은 아돌프의 거짓말을 잘 간과하였다. 보다 나은 가정으로 가능성에 골몰하여, 자기 내면의 한계들을 무시할 때에만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

                                             끝.      

                              

    [칼라 프린터에 관하여]


요즘은 컴퓨터 그림에 푹 빠져있는 중이다. 스캔이나 그래픽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라 마우스를 붓처럼 이용해서 유화처럼 그리는 작업이다. 어깨도 아프고 손가락도 아프지만 그래도 즐겁다. 풍경화 두 점과 정물화 세 점을 그리는 동안 내게 이런 작업을 시도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을 생각했다.

얼마 전, 그러니까 추석 명절이 끝난 뒤 일행 두 명과 함께 한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M선교회 출신이신 B신부님이다. 링컨처럼 키가 크고 손발도 엄청나게 큰 벽안의 신부님이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진 그 분을 처음 만난 지는 벌써 8년이나 된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헤어도 남아돈다. 살기가 심난할 때마다 신부님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나는 그 분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달려갈 수가 없었다. 검소한 생활, 올바른 신앙심 그리고 봉사정신, 그 분은 나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그렇게 원했고 몸소 실천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간혹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분을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내가 제대로 된 신자의 모습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 그분과의 만남을 피해 온 것이다. 그 분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또 남을 사랑하고 따라서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길 원했다. 그런데 세파에 찌든 얼굴로 증오와 미움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자락을 보여주어 그 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어찌 일이 얽히다보니 두 명의 일행과 더불어 그 분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B신부님은 예전에 나에게 어떤 소외 받는 그룹의 모임을 만들도록 권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인 짐이 무거워 숨쉬기조차 힘들다며 거절했었다.(감히?) 지금 그 모임은 다른 사람이 회장을 맡아 그럭저럭 꾸려가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신부님이 그 회장을 불러 내게 그 모임의 회지를 맡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면서 의사를 타진해보라고 하셨단다. 나는 그때 또 내 일상이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을 하려다가 신부님을 생각해서 첫 회만이라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신부님을 만날 때마다 나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저 분은 몇 년만에 한 번씩 나타나는 나를 누군지 기억할까? 여러 곳의 성당을 옮기면서 접촉한 많은 신자들 중에서 나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말의 뜻을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있을까? 남들이 내 대변자나 되는 것처럼 내 얘기를 떠들어댈 때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내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등등. 그런데 내가 확인한 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의외로 이해가 빠르다는 거였다.

신부님은 소찬과 소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우리는 그때 여섯 명이 함께 식사를  했다)회지 건에 대한 질문을 한차례 하시더니 내게 좀 특별한 회지를 주문했다. 요즘같이 우편물이 폭주하는 시대에 한 번 읽고 버릴, 혹은 읽지도 않고 버릴 회지보다 남들이 쉽게 버리지 못할 정도의 가치를 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네 사람의 원고를 받아 그냥 평범하게 편집을 끝낸 상태이므로 속이 좀 뜨끔했다.

신부님은 내게 칼라 프린터가 있으면 그림을 넣어서 멋있게 편집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더니 프린터 값을 물으셨다. 나는 관심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50~70만원 정도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주저 없이 내게 70만원을 주시면서 프린터를 사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당황했다. 능력이 없어서 남을 잘 돕지도 못했고 또 동정심 없는 세상이 야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남에게 동정 받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이럴 땐 사양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신부님은 내 표정이 밝지 않은 걸 보시고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조그맣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한 거요 혹시 또 알아요 그걸 계기로 다른 일을 의뢰 받아 밥벌이가 생길지...”

세상에, 이럴 수가... 내 딱한 사정(?)을 알고 있는 주변사람이나 심지어는 부모형제까지도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그분은 단숨에 파악하고 명쾌하게 해결을 지은 것이다. 나는 속으로 감격스러웠다. 그것으로 밥벌이가 될리야 없겠지만 나를 제대로 기억할 것 같지도 않은 분이 진심으로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를 잠시나마 생각했었다는 확인이 나를 만족케 했다.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갔던 일행(회장)이 내게 똘똘한 충고를 했다. “기왕이면 프린터가 한 백만 원쯤 된다고 해서 더 받아내지 그랬어요. 혹시 잉크 값 모자란다고 우리 회비에서 충당하게 하진 말아요!” 

나는 현실에 눈이 밝은 그 여자의 의도를 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그 여자의 신조이다. 나는 미소 뒤에 숨어있는 비수를 본 듯하여 잠깐 소름이 돋았다. 그 여자는 그 프린터가 내 개인용이 될까봐 목소리까지 히스테리컬하게 변해진 것 같았다.

그래, 필요하게 되면 가져가렴. 그러나 누군가의 가슴속에 있는 내 존재의 확인은 가져갈 수 없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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