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꿈꾸는 죽음/젊은 작가 9인집

푸른얼음 2007. 1. 4. 14:05
 

1998년 x월 x일


          [꿈꾸는 죽음]

       젊은 작가 9인의 단편/문학동네/1997년 10월 초판 2쇄


비 내리던 봄날, 강원도 영월의 동강에 다녀오고 나서 감기를 앓았다. 빗방울 섞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어라연에 발을 담갔기 때문인 것 같다. 당일치기의 촉박한 일정이었더라도 처음엔 여유 있게 우산을 받고 아카시아 만발한 산길과 검은 돌밭을 지나며 얘기꽃을 피우며 걸어갔다. 발원지까지 가서 낚시 줄로 잡아 올린 물고기가 쉬리냐, 아니냐로 잠깐 입씨름을 한 후에 사진 한 장 찍고 가려는데. 갑자기 시간이 촉박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함께 간 일행은 오던 길의 중간쯤에서 물을 건너가기로 했다. 산길을 돌지 않고 물을 건너면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이 제일 얕다는 지점을 찾아 신발과 양말을 벗어들고 청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 다음 물에 들어갔다. 미끄덩거리는 돌들을 밟으며 발에 쥐가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건넜더니 저 앞에 또 건너야할 물이 있단다. 그래서 양말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자갈을 밟으며 걸어가는데, 앞서 간 사람들이 툴툴거리며 돌아온다. 물이 너무 깊어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왕 베린 몸, 하며 그냥 가려는데 너무 강하게 제지한다, 그것도 남자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건너온 물을 되건너갔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여자들 대여섯은 두 번째의 물길을 그대로 건너는 거였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청바지까지 다 벗고 팬티바람으로 건넜다나 뭐라나... (이런 얘기 통신에 쓴 걸 알면 난 살아남지 못할 거야.) 아, 파카를 벗어 허리에 묶었다는 얘길 빼먹었네. 그리고 예쁜 여자들 몇은 계획에도 없는 레프팅까지 하고 남자 등에 업혀 건넜다던가??  예쁘지 못한 나는 혼자 감기 걸리고 지금 사랑니까지 앓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동강댐 건설 결사 반대! 동강을 살리자!! 환경을 보호하자!!!


[꿈꾸는 죽음]은 억지로라도 장편을 읽으려고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또 어쩔 수없이(?) 집어온 단편집의 하나이다. ‘죽음’을 테마로 한 작품들만 모은 것인데, 강규, 한창훈, 김이정, 김영하, 윤효, 백민석, 송경아, 조경란, 권여선 등 9인의 단편들이다. 빌려온 네 권의 장편소설들을 제치고 [꿈꾸는 죽음]부터 읽었다.

제일 먼저 읽은 것은 김영하의 <총>, 김영하의 방식은 나를 편하게 한다. 소재나 서술의 전개가 내 입맛에 맞는다고 한다면 나를 아는 누군가는 혹시 구토를 할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정말이다. 현대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당신의 나무>, 또 함께 실린 <비상구>, 그런 상반된 소재의 접근방식도 내게는 편하게 수용된다. 어느 책에서 읽은 누군가의 말 대로 김영하가 사이버 시대의 신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접근방식은 신세대답게 새로우면서도 고민은 기성세대의 것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에 수긍이 간다. 요즘 각종 세미나나 신문에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사이버, 혹은 통신문학 포함)의 괴리와 수용성, 혹은 접목성을 주제로 한 것이 많은데 그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가가 김영하라고 본다.

o <총>은 무의지의 삶과 연결된 무의지의 죽음을 내포한다. 계획되지 않았던 삶의 시간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그의 계획에는 없었던 우연의 결과이다.  그(석태)가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모호함 속에서 유난히 총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가정의 전형을 잃어버린 세태에 대한 문제제기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것에 대한 소도구로 주인공이 무작위로 쳐들어간 집에 연결되어 있는 인터폰의 신호음으로 즐거운 나의 집(홈, 스위트 홈)을 활용하고 있다. 그는 생을 모색하지 않는다, 단지 즉흥성에 몸을 맡길뿐이다. 그는 그러한 즉흥성으로 총에 빠져든다. 총의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킬 때 들리는 차르륵 소리를 포함해 총에서 나는 모든 음들이 말할 수 없이 산뜻하게 들린다는 것에서 작가는 하나의 죽음을 암시할 수 있지만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자신이 살아왔던 삶과 마찬가지로 인지할 수가 없다,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뫼르소가 햇빛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다면, 그는 간헐적인 청력 상실 때문에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결국 그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임과 동시에 사회적인 죽음이 되어버린다.

o <가던 새 본다> 한창훈의 이 작품은 제일 나중에 보려다가 두 번째로 보았는데 의외로 좋게 느껴진 작품이다. 죽음이라는 테마로 엮은 이 책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잘 들어맞고 충분히 문학적이다. 노파와 총각이 구사하는 걸쭉한 남도 사투리가 여타 다른 작가들이 구사했던 것보다 단연 돋보인다.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눈앞에 보여지는 듯도 하다. 마무리도 훌륭하다.

o <금 여름-불망> 강규의 이 작품은 그의 소설집 [사랑이 나를 만질 때]에서 봤던 것이어서 재차 읽진 않았다. 그의 작품을 읽는 다는 것은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다 읽고나면 작가가 대단히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도 두 번은 읽히지 않는다. 그의 작품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사랑이 나를 만질 때>와 <금 여름-불망>이다. 특히 <사랑이 나를 만질 때>는 다 읽고 나서 작가가 굉장히 수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내 수준이 낮아서인지는 몰라도), 또 그 수고한 만큼의 감동도 느낄 수 있었다.

o <중독> 조경란, 문필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사람이 소설가 소설, 즉 메타픽션에 손을 댄다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 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메타픽션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작가의 문필 경력이 메타픽션을 시도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그런 것도 잘 모르겠다. 다만 젊은 신진 작가일수록 습작시대에 받았던 고통들을 형상화하고 싶은 유혹을 많이 느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살아온 짧은 인생과 비례해서 그 고통은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므로. 단적으로 말해 이런 소재는 너도나도 문학에 뜻을 둔 사람이면 한 번 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작가에게선 아직 세련된 프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짜임새가 견고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한 편의 소설도 써내지 못한 소설(가)와  한 편의 곡도 써보지 못한 작곡가는 내게 서글픔과 위안을 동시에 안겨준다(?).

o <수의> 김이정, 아직 주변에서 죽음을 보지 않아 장례절차를 모르는 상태에서 읽은 이 작품은 수의에 대한 정보 하나만으로도 흥미롭다. 의붓 올케가 시누이에게 설명해 준다.

“해연이 아가씨는 이거 처음 보지요? 수의는 바지, 저고리, 도포, 이불까지 전부 세 벌씩인 데다 이런 소품들도 굉장히 많지요. 이건 과도라고 얼굴 싸는 거고, 이건 손을 싸는 幄手, 이건 망건이고...... 이 비단 수건들은 저승에 가서 동료 분들에게 나눠줄 정성이래요, 정성을 아버님처럼 이렇게 많이 해 가시는 분도 드물 거예요, 많이들 나눠드리면 좋겠지요..... 이것들 모두 어머님이 30년 동안 하나 하나 만드신 거예요. 옷감 좀 만져봐요, 요샌 이런 공단 구할 수도 없어요. 이 저고리는 손으로 직접 짠 명주예요. ---------- 더구나 수의는 실매듭도 없이 만들기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이거 전부 미싱 하나 쓰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하신 거예요, 바느질 자국이 옷감에 살짝 스친 것만 같으니, 어머님, 이게 小殮衾이죠? 이 이불은 물까지 어머님이 직접 들인 거예요. 향나무 삶은 물에 들인 건데 참 은은하죠?”

 -----------------

다림질하던 미연이 빨강, 초록, 노랑 색으로 만든 방울 만한 비단 주머니를 들어 달랑이고 있었다.

“그게 五囊이라고 양쪽 손발톱하고 머리카락 넣는 주머니 아니더나?”

노파는 남색 비단으로 만든 신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작가는 <수의>를 통해 씨앗을 본 본처의 분노와 한의 승화과정을 그리고 있다. 무난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애인인 경수라는 인물은 사족으로 생각된다.

o <아주 오래된 연서> 윤효. 감상적인 후일담 소설 같다. 공지영이 공주이면서 투사 흉내를 내려던 것과는 달리 윤효는 그냥 끝까지 공주로 밀고 나가고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흔한 스토리인데도 독백으로 일관할 수 있는 데는 아무래도 작가적 역량이 필요할 것 같아 점수를 줄 수도 있겠다.


출판사가 {문학동네}라 그런지 문학동네 출신작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부정이라든가. 긍정의 뜻을 나타내는 건 아니다. [문학과 지성] 십 년 분을 보관하고 있는 나로서 요즘 책방에서 그 후속인 [문학과 사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 아쉬운 마음도 든다.

'Reading desk 98'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에 관하여/장그르니에  (0) 2007.01.04
비/서머셋 모옴  (0) 2007.01.04
불임의 사랑, 모성이라는 공포/류보선  (0) 2007.01.04
'97 동인문학수상작품집  (0) 2007.01.04
'98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0) 2007.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