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x월 x일
성석제의 [조동관 약전] 너무 재미있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두 번씩 웃었다. 폭력과 성, 그 구질구질하고 유치한 얘기를 희화적으로 이끌어나가면서 종래에는 휴머니즘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성석제의 작품을 재평가 해야겠다.
몇 년에 전에 성석제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내 인생의 마지막 15초], 45초던가? 숫자에 자신이 없어서... 하여간 그때도 역시 인상 깊어서 우리 선생님(교수라는 칭호를 싫어하시는)께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한)강 다리 위에서 강으로 떨어지는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전 인생을 생각해낼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도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는데 그것의 결점도 역시 건널목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어지는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해 낼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선생님인지라 글에 관해서 매우 까다로운 분이셨는데 한편으론 내 취향(?)에 맞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분도 나를 수제자쯤으로 생각하셨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선생님께 ‘저는 선생님 제자 될 자격이 없어요.’ 라는, 뚱단지 같은 말을 하고는 선생님 곁을 떠났다. 그러고는 벌써 3년째 인사도 못 드리며 살고 있다. 그래도 선생님은 아직 까진 나를 이해하고 계시다는 소문이다. 그 선생님이 보고싶다. 그러나 그분을 만나려면 빈손으로는 갈 수 없다. 내 손에 원고뭉치가 들려있어야만 가능하다.
아, 그리고 같이 공부하던 한 남자도 보고 싶어진다. 그는 희한하게 나와 생일이 같다. 어떤 동인에서 생일이 같은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되는 걸까? 그런 우연이 내겐 별로 감동적이지 못했지만 그는 내 생일 때마다 책도 선물하고 동숭동에서 맥주도 사주고, 또 월급을 탓다고 틈틈이(?) 밥도 사곤 했었다. 음~ 올 여름에는 내가 조금 갚아야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는 내가 동인을 떠난 것에 대해 섭섭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다. 왜 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버거운지 모르겠다. 가끔가다 내 성격에 환멸을 느낀다. (삼천포로 가는 길이 아직 남았나? 그러나 내가 삼천포로 빠진 것은 <조똥깐>이 탓이다.)
[조동관 약전], 아무튼 재미있다. 세상살이를 따듯하게 보는 작가의 시각이 느껴진다. 문장을 고르는 솜씨도 훌륭하다. 항간에는 에로티시즘의 표현방법을 파격적으로 적나라하게, 혹은 성기의 표현방법을 외래어에서 순 우리말로(언제 적부터 우리말에 천착을 했는지...) 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선구자적 예술가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독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열한 수단일 뿐이지 결코 문학은 되지 못한다. 적어도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려면 직설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상상력이라는 발포성의 자극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석제의 에로티시즘은 성공적으로 보여진다.
P258에 나오는 부분은 노골적인 단어들이 없어도 아주 에로틱하다.
- 은관은 노름판에 차 배달을 나오는 다방 아가씨 가운데 말을 닮은 아가씨를 올라탔는데 하필이면 은관의 엉덩이가 들썩이던 그 시간에 그의 부인이 들이닥쳤다. 은관의 머리칼을 잡아챈 그의 부인은 은관의 신체의 일부가 다른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 뿌리를 잡고 늘어져 어디까지 갔다더라? 그 건물 옥상까지 가서 온 읍내 사람들이 다 듣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쳤는데, 그 내용인 즉 <어허, 읍내 사람들이요. 여기 좀 보소 이게 내 서방 물건인데 쥐불알만하지요? 이것도 잘못 놀리다가는 이렇게 죽습니다이.> 하고는 옥상 난간에 제 서방 머리를 박아서 피칠갑을 하게 만들며 노름판에서 돈 잃은 읍내 사람들에게 며칠은 입에 올리고도 남을 이야깃거리를 안겨 주었다. 순전히 공짜로.-
이외에도 이 작품의 매력은 손에서 놓기 싫은 흡인력에 있다. 현을 고르듯이 문장을 만들어가며 리드미컬하게 넘어간다. (수상작은 읽다가 여러 번 일어났다, 흡인력이 없어서.) 그리고 이 작품이 은근히 재미있는 것은 제도권 폭력에 대한 풍자와 야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똥깐이를 잡기 위해 출동한 기동타격대의 한 사람이 뒤돌아 서서 오줌을 누다가 똥깐이가 던진 돌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 후송되었는데 그 사람은 그 상처와는 관계없이 몇 주 뒤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경찰서장은 그 경찰을 기리는 <경찰충령비>를 남산의 바위 앞에 건립하게 하고 ‘정의와 질서를 구현한 경위, 소탕작전에 참가했다가 장렬히 산화한......’ 을 구구절절이 국한문 혼용체로 삐뚤빼뚤 적어놓았는데 나중에 누군가가 경찰서장의 이름을 정으로 까서 지우고 <똥깐이가>라고 썼나나? 결국은 민초들한테는 못 당한다는 얘기지 뭐.
구수한 입담이었다. 그 안에 칼 같은 의미들이 숨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Reading desk 98'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꾸는 죽음/젊은 작가 9인집 (0) | 2007.01.04 |
---|---|
불임의 사랑, 모성이라는 공포/류보선 (0) | 2007.01.04 |
'97 동인문학수상작품집 (0) | 2007.01.04 |
'98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0) | 2007.01.04 |
아웃 사이더/콜린 윌슨 (0) | 2007.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