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불임의 사랑, 모성이라는 공포/류보선

푸른얼음 2007. 1. 4. 14:02
 

1998년 x월 x일

                                           

 


            <不姙의 사랑, 모성이라는 공포>

            류보선(군산대 교수)/동서문학 봄호


나는 누구인지도 모를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허공에 걸린 긴 나선형의 철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 꼭대기에는 역시 이름을 알 수 없는 놀이기구가 거대한 공룡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올라야 할 높은 곳을 바라보며 나는 지레 숨이 차하면서도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에게서 약간의 위로를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론 남자가 떠나면 어쩌나 하는 작은 불안을 느끼고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어느 만큼 올라가서 이제 올라가기에 익숙해져 있을 때 남자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휘어진 계단의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나를 밀었다. 그곳에는 경사가 완만한 흙길이 있었는데 그 길은 지상으로 안전하고 넓게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 남자와 함께 정감 있는 흙을 밟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시퍼런 바다를 바라보는 사이 그만 남자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남자가 가버릴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냥 마음 편하게 파도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꿈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일 주일 동안 나를 괴롭혔던 감기의 제 증상들이 내게서 떨어져나갔음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산뜻한 기분이었다.

문밖 출입을 안 하는 사이 우편함이 가득찼다. 문예지 두 권, 시집 한 권, 엽서, 주간 신문, 그리고 각종 고지서와 유인물을 안고  들어와 우선 누런 봉투를 개봉했다.  연두색 표지의 [동서문학]이 나온다. 두통 때문에 활자를 멀리했던 때문인지 갑자기 활자에 군침이 돈다. 나는 우편물들을 어질러놓은 상태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권두 칼럼의 진덕규씨, 아는 사람이다. 전에 [현상과 인식]이라는 책을 만들었었고, 또 아주 더 오랜 전에 그 사람에 관한 기억도 하나 있다. 물론 그 사람은 모를 테지만....

시에도 아는 사람(?)이 있다. PC통신에서 보았던 글이 시가 되어 있다. 하이텔에 제비도 있고 꽃뱀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비유로 본다면 그 박 아무개씨는 꼭 황야(하이텔)의 이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비유가 본인한텐 어떤 기분이 들게 할는지는 몰라도 부러운 것 한 가지는 있다. 통신에 올린 메모를 작품으로 만들어 긍정적인 밥이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난 달, 모 소설가와 술잔을 놓고 앉아 약속 비슷한 것을 했다. 그것은 “밥이 되는 글을 쓰자!”였다. 물론 그 소설가는 내 처지와 비교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래 전에 천만 원이라는 현상금이라든가 무슨 문학상을 탄 이력도 있고 현재도 출판사에서 선금을 받고 글을 쓰고 있다니 거의 아마추어나 다름없는 나와 비교될 턱이 없다. 그래도 그 말이 내 가슴에 남았던 것은 뭣도 없이 대중성을 경멸하고자 했던 내 허영을 깨닫게 해준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약속이나 깨달음도 무위다. 나는 아마 현재에도 미래에도 밥이 되는 글을 쓰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는 이제껏 한 줄의 글도 제대로 쓰질 못했으니까.

소설에는 이순원의 <해파리에 관한 명상>이라는 중편이 있고, 두 사람의 단편도 있다. 사진을 보니 이순원 씨는 인물도 좋고, 인상도 좋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꼭 이십 년 만에 완성한 글이라는데 왠지 급히 완성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단편의 주제를 억지로 중편으로 만들었다는 느낌, 물론 한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단편이 부족했겠지만 전체적으로 지루하고 흡인력이 없는 것은 내가 단순히 서울내기여서 고향의 정서, 친척이나 이웃의 정서에 무지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씨의 이번 작품은 담론이라기보다 거의 이야기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일인칭 관찰자의 시점이어서 그런지 해파리 아저씨의 처절한 실존의 고통이 크게 와 닿질 않는다.( 혹시 그런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까? 어쨌든 나는 비평가가 아니므로 내 말에 책임을 질 의도는 없음. 그냥 아마추어의 서툰 감상으로 치부해 두시기를...) 그리고 씨가 다루는 소재의 몇몇은 윤대녕 씨의 그것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것의 호, 불호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른 잡지에도 비슷한 시기에 장편을 시작하셨다니 혹시 이번 작품에는 성의가 덜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거침없는 생각을 해본다.    

문학현장 탐방에는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김춘수의 [꽃의 소묘]에서 [들림, 도스토에프스키]가 다루어지고 있다. (두 권 다 내 책상에 있음.)

그리고 비평이다. 어디선가 불경기에는 소설보다는 비평이 더 잘 읽힌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사방에 비평서적이 많이 보인다. 신문을 보니 다음 달엔 [무애]라는 비평서가 창간될 거라는 기사도 있다. 이 책에도 비평이 세 편 실렸는데 모두 재미(?)있다. 특히 류보선씨의 <불임의 사랑, 모성이라는 공포>는 소설보다 더한 흡인력으로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의 논지에 전적으로 유쾌하게 동의함으로 여기에 임의대로 요약을 해 보겠다. 거의 원고지 200매에 육박하는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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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임의 사랑, 모성이라는 공포


1. 소설 형식의 변화와 최근 여성소설의 문제성


90년대 문학의 핵심적인 특징은 여성작가들이 한국문학의 중심부를 장악했음이다. 따라서 90년대 문학이 서 있는 자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근 여성작가들의 소설이 지니는 문제성에 대한 깊은 논의가 절실하다. 특히 주목해야하는 대상은 신경숙, 김형경, 은희경 등이다. 이들의 소설에는 소설 문법 상의 중대한 변화가 감지된다. 그들은 이전시대 남성작가들의 소설과는 다른 소설의 문법으로 한국소설사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하다.

이제까지의 소설은 ‘집 떠나는’ 남성들의 출사표이자 귀향하는 아들들의 환멸, 환희, 참회를 담은 고백록이었으며 동시에 소설의 역사는 ‘페넬로페’의 ‘한숨’을 뒤로 한 채 세계의 중심을 향해 다가서는 오디세이적 모험의 역사였다. 허지만 최근 여성작가들의 소설은 분명 루카치가 규정한 것처럼 ‘성숙한 남성의 형식’은 아니다. 그들 소설의 주인공은 유년기를 행복한 것으로 기억하지 않는 듯하며, 개인의 모험과 사회적 발전이 조화를 이루는 서사시적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떤 까닭인지 자기완성을 위해 모든 고난들과 맞서는 대신 작은 시련 앞에 쉽게 절망하고 어떠한 모험도 감행하지 않는다. 이전의 소설이 ‘모험의 서사시’라고 한다면 최근 여성작가들의 소설은 ‘환멸의 서사시’라고 이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설적 형식은 이제까지의 소설과는 다른 계보를 구축하고 있다.


2. 아비들에 대한 공포, 혹은 여성적 정체성의 발생론적 근거


90년대 들어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기를 고집하던 소설이 갑작스레 쇠퇴하고 그 자리를 여성적인 목소리가 메웠던 필연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한 시인이 “활처럼 긴장해도 겨냥할 표적이 없다”고 선언하는 순간, 현실의 본질을 읽어내려는 모험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불분명한 의식에서 분명한 의식으로 성숙하려는 치열한 과정이 숨죽이기 시작했다. “본질은 절대로 찾아야 하지만 동시에 본질은 절대로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소설의 운명이고 이 운명에 충실하고자 한 결과가 ‘성숙한 남성의 형식’으로서의 소설로 현상했다면 90년대 들어 소설은 ‘절대로 찾아지지 않는 본질을 절대로 찾아내야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더 이상 의미있게 병존시키려는 노력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소설 전반은 갑작스레 나타난 낯선 풍경과 더불어 불분명해진 ‘나’를 보다 분명한 ‘나’로 비약시키려는 치열한 과정을 지속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음흉한 세계에 대한 인정과 ‘모험의 서사’의 정지는 한 개인에 속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문학의 특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우리의 ‘집떠나는 남편(아들)’들, 즉 우리의 오디세우스들은 세계가 교활하고 음흉하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 그들은 필연적으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그런 황폐한 내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아들들은 변화를 원치 않는 현실을, 그 현실의 정점이자 동시에 그 현실을 유지, 보존하는 존재인 아비를, 그리고 그 아비 밑에서 성장하여 자신의 영혼에도 긍정적인 것이건 부정적인 것이건 아비의 삶의 논리가 스며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아 왔다. 아비 앞에서 아들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데 그것은 아비에게 어떤 전율스러우며 공포에 가까운 권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들들은 아비의 권위에 공포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아비의 왜소함에 공포를 느낀다. 한국의 아들들은 항시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질서, 사회운영 프로그램을 전면적으로 기획하고자 했으며, 그를 위해 노동자, 농민, 산책자, 룸펜, 창녀, 변태성욕자 등등 기존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려는 자들 곁으로 가거나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체현하기 위해 과거의 삶을 폐기하고 변신을 감행한다. 이 변신은 가출에서 시작되며 80년대까지의 한국소설사가 주로 ‘집떠나는 아들(혹은 남편)’의 시선에 의해 형성, 전개된 연유도 여기에 있을 터이다. 아들들이 펼치는 모험적 행동은 그러나 모두 좌절한다. 그들은 단호하게 집을 떠나서 세계의 중심부를 장악, 세계를 전면적으로 재기획하려 했지만 ‘밑으로부터의 혁명’도 ‘위로부터의 개혁’도 그리고 ‘옆으로부터의 혁명’도 실현하지 못했다. 한국의 모든 모험적 행동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 보잘것없어 보였던 아비의 세계가 사실은 철옹성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들들은 굳이 부인할 것이지만, 그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는 이미 ‘나 빼놓고 다 망해라’라는 아비의 유일한 논리, 즉 속물주의(혹은 속물근성)가 망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러한 속물근성은 아들들이 자신의 전존재를 건 실천과, 실천을 통해 즉자-대자적인 존재로 전환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아비는 왜소하기에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두려운 존재이며, 정작 보잘것없는 존재는 젊은 열정 하나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아들들인 것이다.

왜소하지만 그 왜소함이 생존할 수 있도록 거대한 질서를 갖춘 아비들의 존재방식, 이것이 우리의 오디세우스들을 좌절시킨 요인이라면 이러한 아비의 존재방식은 동시에 여성적인 목소리를 90년대 한국문학의 중심부로 진입시킨 주요한 조건이다. 90년대 한국문학에게 가장 절실한 과제는 왜소한 아비들이 만들어놓은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면밀한 접근이었지만 아들들은 아비들의 왜소한 겉모습만을 본질로 인정했고 그러한 태도를 여전히 유지함으로써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면밀한 접근은커녕 오히려 시대적인 방향감각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반면 여성작가들이 놓인 자리는 달랐다. 그들은 현실을 견고하게 지켜내는 힘인 가부장적 질서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비가 결코 왜소하지 않으며 철옹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아비로 인해 생존의 위험까지 경험했던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내면세계는 이미 존재하는 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마성적인 것이 강렬하게 깃들어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삶의 타성을 벗어던지지 않는 한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를 증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3. 성장 장애, 혹은 성장 거부-여성적 글쓰기의 정체성 (1)


최근의 여성작가들이 발표하는 공통의 화두는 ‘고통 받는 여성’이다. 이제까지의 소설의 역사는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서사였다.

‘고통받는 여성’을 다룬 여러 시각 중 주목할 만한 시선은 바로 최근 여성작가들의 소설에서 자주 나타나는 ‘성장장애’ 혹은 ‘성장거부’라는 모티브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여성들이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겪는 고통의 정도를 예각적으로 드려내는 것은 물론 왜 여성들이 불우한 처지를 오로지 견뎌내는가(달리 표현하자면 여성들이 세계사적 개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자기보전적인 삶을 사는가, 혹은 ‘나’의 가치를 타자가 자신의 가치로 인정해주기를 의욕하고 실천하는 위신투쟁을 치열하게 감행하지 못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져 있어 주목된다.

그녀들의 유년의 풍경엔 주인인 아버지가 있고 노예인 어머니가 있다. 거기엔 ‘대자적인 입장에서 자기존립을 고수함을 스스로의 본질로 하는 자립적 의식’을 지닌 당당한 아버지와 ‘생이나 대타적 입장에 있는 존재를 자기의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 의식’으로 허덕이는 어머니가 있다. 이 일차적인 경험은 그녀들에게 남성은 세상의 주인이며 여성은 그 주인의 논리에 순응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어떤 법칙성을 의식 깊숙한 곳에 심어준다. 경우가 어떠하든 그녀들의 유년은 걷잡을 수 없이 불행하다. 왜냐하면 그 유년의 풍경엔 아비로 인해 황폐한 어머니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 어머니의 모습은 유년기의 그녀들이 상정할 수 있는 자신의 미래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비가 존재하지 않는 유년이 기쁨으로 충일해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아비의 부재, 즉 어머니의 지아비의 부재는 어머니에게 큰 고통으로 다가오며 그 고통은 딸에게 전가된다. 아버지라는 중심점이 존재하지 않는 가족은 훼손되고 일그러진다.

그녀들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정작 큰 고통은,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찾으려고 해도 그 모험이 폭력적인 남편 곁에 있는 것보다 더 큰 시련을 가져다주곤 하는 엄연한 현실에 있으며, 그에따라 여성들 자신도 자신들의 지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용기와 결단을 상실했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즉, 당장 경험하는 고통도 문제지만, 이 고통을 영원히 감내하는 것 외의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 이것이 현재 여성의 삶을 온전치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며, 이것의 제일 밑바닥에는 가부장적 질서가 장승처럼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4. 모성에 대한 공포-여성적 글쓰기의 정체성 (2)


최근의 여성작가들은 이 힘겨움 속에서도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성숙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받지 못한 어머니’를 껑충 뛰어넘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사랑받는 여성’이 되는 것일 터이다. 하여 그녀들은 사랑에 집착한다. 그녀들은 낭만적 사랑의 완성보다는 사랑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들은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들은 사랑의 결과가 두렵다. 그녀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욕망하는 사랑의 끝에는 결혼이 있고, 그 결혼으로 인해 그녀들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녀들은 사랑의 끝에 그녀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리하여 영원히 거부하고 싶은 가부장적 질서가 어두운 심연처럼 놓여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녀들은 남성과 여성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황홀하게 꽃피었던 사랑, 즉 미성년의 사랑을 기억하고 꿈꾼다. 그리고 미성년의 사랑에 대한 집착은 종종 동성애의 감정이나 근친상간의 감정으로까지 확장되는 바, 사회적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할 정도로 그녀들은 미성년 상태의 사랑에 열의를 보인다. 그녀들이 꿈꾸는 사랑은 일체의 사회적 구속이 끼어들지 않는 사랑이다.

결과적으로 그녀들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성의 시간을 삶의 긍정적인 계기로 설정하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모성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경험된다. 그녀들이 어머니되기를 곧 정체성의 상실로 등치시키는 것은 크리스테바가 지적했듯, 한편으로는 임신 자체가 주체의 분열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되는 과정을 곧 ‘껑충 뛰어’넘고자 했던 어머니의 삶과 자신의 삶이 동질화되는 순간으로 감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들은 사회적 규약이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불행한 삶 때문에 결굴은 그들의 타고난 성, 즉 생물학적인 성마저 부정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행한다. 그 정도로 가부장적 질서는 여성들에게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영혼 구석구석까지 새겨넣고 있는 셈이며 최근의 여성적가들은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을 ‘불임의 사랑’과 ‘모성에 대한 공포’라는 모티브를 통하여 충격적으로 제시한다.


5. 유아적 사랑, 그 빛과 그늘


최근의 여성작가들은 어머니와 딸이야말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남편과 아들 혹은 오빠와 동생을 위하는 利他적인 존재들이며, 자연에게서도 인간을 느끼는 휴머니즘적인 가치를 잃지 않은 존재들로 형상화한다.

하지만 유아적 사랑에 대한 집착은 최근 여성작가들의 소설이 지닌 문제성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최근 여성작가들의 소설을 제한하기도 한다. 그녀들은 ‘불임의 사랑’과 ‘모성에 대한 공포’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성이라는 미묘한 체험은 모성의 체험을 행하지 않은 딸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머니의 삶은 불행하고 전근대적일 뿐이며 따라서 껑충 뛰어넘어야 하는 대상이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계산 가능성과 맞서는 숭고한 정신을 가능케 할 수도 있다. 즉 어머니의 삶이란, 불행하지만 동시에 숭고하며 전근대적이지만 동시에 탈 근대적인 존재방식이다.  어머니되기를 거부한 딸들은 이러한 양가적인 삶을 현저히 단순화시켜 한 단면을 전체로 증폭시킨다. 이는 이들보다 앞선 세대의 여성작가들과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앞선 세대의 여성작가들은 예컨대 박경리, 박완서, 오정희, 양귀자, 윤영수 등은, 어머니의 삶이 가지는 양가적인 가치를 정확하게 읽어낸 바 있고 그를 통해 어머니를 어머니의 실체에 근사한 형상으로 창조한다.

이 어머니되기의 거부는 단지 어머니의 실체를 단순화시키는 문제점만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시선을 과거에 고정시켜놓기도 한다. 과거의 사실을 기반으로 형성된 현재의 의식을 굳건하게 고집함으로써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움직임이 없는 어떤 정형물로 고정시켜 놓았으며 또한 더욱 근원을 찾아나가려는 노력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아들들은 아비를 껑충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자기실현이 불가능했다면, 이 페넬로페의 후예들 역시 어머니를 껑충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외화시키기 위해서 이 강박관념을 과감하게 떨치는 용기와 결단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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