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x월 x일
나는 아웃사이더인가?(이다)
몇 년 전에 신문에서 토끼와 여우에 관한 우화를 읽은 적이 있다. 아마 프랑스 우화 아니면 소련 우화였을 것이다. 독일 우화였나? 어쨌든 내용은 이러하다.
- 동물들이 사는 마을에 어느 날 토끼 가족이 이사를 온다. 그런데 마침 그 마을에 대표를 뽑는 행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후보로 나서게 된 동물은 마을에 오래 살고 있던 여우와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는 토끼네였다. 그런데 마을사람(동물)들에게 표를 얻기 위한 토끼와 여우의 전략이 아주 대조적이다. 마을의 터줏대감 내지는 유지로 인식되고 있는 여우네 가족은 여러 동물들을 찾아다니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쳤고, 토끼네는 이집 저집을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자꾸 가르쳐달라고 졸라대어 마을사람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얼마 후 투표의 결과는 여우의 예상을 뒤엎고 토끼로 결정되었다.
나는 대선후보자들의 선거전략을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 얘기는 하도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니까 나 같은 사람이 끼어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정치가는 없고 정치꾼만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저 토끼 같은 친구(후배)의 얘기를 하려 함이다. 아니, 그저는 아니고 매우 심각한 자기 탐구인 셈이다. 그 친구가 토끼가 되면 상대적으로 나는 여우에 해당되는 인물이 된다, 물론 여우처럼 감투를 쓰거나 남을 가르치려는 생각은 없지만.
그 토끼 같은 친구는 나에게 뭔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나를 잘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순수함을 먼저 따지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늘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이 친구는 천성이 그러한지 처음엔 약간 닭살이 돋을 뻔도 했지만 차츰 그게 진심으로 느껴지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같은 여자인 나한테도 비음이 섞인 애교 있는 목소리로 문학에 대한 편달을 요구했고, 자신의 불편함을 누르고 애써 대접하려는 노력도 보였다. 그리해서 그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그 친구의 너무 빠른 성취는 내게 공연한 자격지심을 느끼게도 하고, 의도적은 아니었겠지만 내가 발판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들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 친구는 내가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이에 또다시 자신이 목적한 바를 얻기 위해 토끼 같은 자세로 부지런히 활동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사실 난 그 친구가 부럽지는 않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 얻고 싶지도 않다. 그 친구가 얻게 될 그런 것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한 건, 그런 내가 대다수의 사람에게 실패자로 비쳐진다 데에 있다.
엊그제 그 친구는 집안에 틀어박힌 나를 끌어내기 위해 전화를 했다. 나는 수 차례 거절을 헀지만 그 친구는 (나 같으면 단번에 끊었을 전화를)끈질기게 권유했다. 나는 그 친구가 내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어 외출을 했다. 그리고 밥을 먹고 [편지]라는 영화도 보았다. 영화에 대한 비평을 나누다가 얘기는 자연히 사랑 쪽으로 흐르게 되었다.
우리는 ‘냄비 같은 사랑’과 ‘가마솥 같은 사랑’을 비교 하게 되었는데, 내가 가마솥 같이 더디 끓지만 오래가는 사랑을 원한다고 하자 그 친구는 사랑이면 됐지 냄비고 가마솥이고를 따질 필요 있느나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그 친구가 내게 핀잔주는 말은 언제나 같다. “제발 어른 좀 되세요! 맨날 어린애 같으셔. 도대체 언제 어른이 될 거에요?” 나는 이 말만 들으면 심장에 무두질을 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반발하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서도 간혹 듣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중요한 ‘인간관계’에서 나의 미숙함을 지적하며 내게 조언을 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냅둬, 난 그냥 이대로 살겨~”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유치한 어린애에서 탈피 할 방법이 없나를 고민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얼로 보든 상관없지만 그런 핀잔에서 내 스스로 위로 받을 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심장이 편할 것 같아서다. 그리해서 내가 찾아 낸 단어는 ‘아웃사이더’이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라 아웃사이더일 것이다. 그것을 지지한 군상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
어린애보다 아웃사이더가 더 좋은 것이지는 알수 없지만 지금은 그 말이 더 위로가 된다.
-------------------------------------------------------------
[아웃 사이더]
콜린 윌슨/ 이성규譯/ 범우사/ 1974초판/ 1977중판
이 책은 헌 책방에서 구입한 것이다. 종이는 누렇게 퇴색되었고 행도 세로줄이다. 이것을 샀을 때의 감정은 기억나지 않는데 줄 쳐진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내가 꽤나 즐겨 읽었던 것 같다. 그것이 언제였을까? 왜 그 좋은 황금 같은 시절을 왜 이런 음습한 색깔로 덮어버렸던 걸까...
이 책은 콜린 윌슨이 24세 때 출판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자신이 유명해졌음을 알았다,고 한 바이런 이후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콜린 윌슨뿐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매스컴은 그의 해박한 지식에 탄복했고 그의 지식에 대한 비평과 비교방식을 부러워하고 질투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관적 사고를 객관화시킬 수 있게 콜린의 말을 옮겨 적는 것이다.
아웃사이더: 어느 사회나 어느 패거리를 막론하고 그 사이에서 원만하게 아무 탈없이 지낼 수 없는 사람, 국외자, 열외자.
0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인간은 진실한 의미에서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다. 안일을 추구하며 그날그날 살아가는 인간들은 마치 곤충 같은 인간이며 동물과 다 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아웃사이더적 인간은 자연히 방황 하게 되며 정말로 참된 삶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끝없는 순례를 하는 것이 다.
0 아웃사이더란 언뜻 보면 사회문제다. 그는 눈에 띄이지 않는 존재다.
0 나는 너무 깊이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보는 것이다.
0 그의 끊임없는 상념의 나래는 과거의 情事와 육체적 쾌락에서 죽음의 문제에까지 이른다-죽음, 그것이야말로 모든 관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생 활의 문제로 되돌아 간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라고.
0 적나나한 인간의 모습... 나는 그것을 표현해 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상상력에 따 른다. 그러나 나는 진리에 따른다.
0 이처럼 한 육체 속에 원숭이와 인간이 함께 있고 원숭이의 욕망이 만족되어질 것 같은 순간에 원숭이는 사라지고 인간이 나타나 인간은 원숭이의 욕망에 정나미가 떨 어지게 마련이다.
0 아웃사이더가 예술가일 수는 있지만 예술가는 반드시 아웃사이더는 아닌 것이다.
0 아웃사이더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혼돈이 적극적인 것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을만한 이유를 아웃사이더는 갖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유태인의 신비사상에 의하면 혼돈이라는 것은 질서의 잠재적인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즉 알은 새가 창조되기 전의 혼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며 혼돈에는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0 예술 작품도 그를 감동시킬 수는 없었다. 예술은 사상이며 사상이라는 것은 사상의 겉모습을 믿을 수 있을 만큼 약한 인간들에게 질서를 부여해 줄 수 있을 뿐이다.
0 아웃사이더는 실존주의적인 말로 자기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육체와 정신>이라든가. <인간과 자연>이라고 하는 구별에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관념은 신학적인 사변이나 철학을 낳게 하는 것으로 <아웃사이더>는 사변도 철학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단 하나의 구별은 <존재와 무>이다.
0 괴로움의 문턱 이편에 사는 자는 다른 편에 살고 있는 자와 다른 종류의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는가. 아웃사이더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는 변종이 아니라 낙관적이고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보다 민감한 인간이라는 결론이 명백해진다. 만약 종교란 것이 인간의 정신적 긴장을 완화하는 생활의 길을 뜻하는 거이라면, 아웃사이더는 낙관적이고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종교를 가졌다고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신념에 살지 않는 한, 종교란 세계의 최고봉은 에베레스트나 메루 두 개의 산 중 하나라고 믿는 것 같은 중요성밖에 갖지 못한다,라고 아웃사이더는 항변할 것이다.
0 아웃사이더는 어떤 내면적 긴장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긴장을 어떻게 해소하느나?하는 자문을 하고, 그 究明에 힘쓰게 되는데 정신과의사에게 보내라고 하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의 자신만만한 해답은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0 아웃사이더와 자유가 항상 연관되고 있음은 어렵지 않다. 아웃사이더의 문제는 필시 자유의 문제이다. 그가 궁극적인 긍정과 긍극적인 부정에 전념하였다는 사실은 절대적 자유 혹은 절대적 속박에 얽매어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로깡땡]이나 [황야의 이리]나 [반 고호]를 돌이켜 본다면 인간은 자기가 자유가 아님을 알아 고민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아웃사이더가 된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인간은 까뮈의 뫼르소와 같은 평범한, 한 번 태어났을 뿐인 인간일 동안은 자유가 아니다. 또한 자각하고 있지도 않다. 이는 그의 무지가 유별났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뫼르소의 인생은 비현실이며 그는 막연하게나마 이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하여 현실을 발견할 때 자기의 인생이 비현실적이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해준다.
0 아웃사이더는 아웃사이더임을 그만 두기를 언제나 목표 삼고 있음을 말한다. 이 목표를 지향하는 세 가지 수련 중에 하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가 아웃사이더임을 바라지 않고, 또한 평범한 사회인인 것도 원치 않는 다면 도대체 그는 무엇이 되고자 할까?(???? 궁금하신 분은 책을 읽어보시기를)
과거에 밑줄 친 부분들을 옮겨 적기도 힘에 벅차다. 졸음이 쏟아져서 미칠 지경이다. ‘죽음이란 잠자는 영혼’이라는 롱팰로우의 시구를 읊조리며...
'Reading desk 98'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꾸는 죽음/젊은 작가 9인집 (0) | 2007.01.04 |
---|---|
불임의 사랑, 모성이라는 공포/류보선 (0) | 2007.01.04 |
'97 동인문학수상작품집 (0) | 2007.01.04 |
'98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0) | 2007.01.04 |
'98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0) | 2007.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