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98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푸른얼음 2007. 1. 4. 13:54
 


1998년 x월 x일


                    ['98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월급을 준다는 어느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합격 통보를 기다리는 동안  일 주일이 흘렀다. 그  일 주일 동안 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면접을 본 사람의 표정이 나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합격에 대한 기대감은 절반을 넘어 51%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합격 통보를   해 준다는 그 날자와 시간에 울리는 전화 벨 소리를 듣고도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갑자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요구되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내가 감당해내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공포감으로 변해 내 심장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래도 또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아직도 나는 조직을  싫어하고, 남의 명령을 받들기 싫어하고, 속물주의를 싫어한다.  그리고 이런 나를 이용해 먹기 좋아하는 세상의 속성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런 세상을 알면서도 도전해 보기에는 내  의지가 너무 박약하다는 것 역시 수 차례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얻을 것은 패배감뿐인 것이다.

내가 세상과 부딪칠 때마다 자신에게 되묻는 질문은, 과연 나는  이 세상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하는 가슴 저미는 초라한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결코 아니다!' 이다. 그래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라 혹자는 대단한 투지와 혹은 무지를 무기 삼아 기왕의 자기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런 의욕을 폐기한지 오래이다. 욕망을 거세당했다는 뜻이다. 가끔은 삶에 활력을 찾기 위한 시도를 해 본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공을 맛 본적은 없었다. 남들은 내가 가진 몇 가지를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속에서 빛을 거두어 간 것들이라 더 이상 내게 희망이라는 의미를  떠올리게 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나의 심리를 오늘 난 이상문학상을 수여 받은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에서 되새김하고 있다.

     


    <아내의 상자>  은희경


 은희경의 작품은  처음 읽는 것이다.   지난번에 다른  친구에게서 빌린 [새의 선물]은 과거로 들어가는 첫 페이지까지만 읽고  다른 일로 바삐 다니느라 아직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요즘은 책을 여러  곳에서 빌려  읽고 있다. 한때는 나도 각종 문예지며 문학상 수상집을 섭렵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런  것들에게서  멀어져 있던 자신을 새삼 느낀다. 유행을 싫어하는 내 성격 탓도 있지만 쏟아지는 글과 작가들에 대해 멀미를 느끼고 있었던 점도 없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전달하고픈 이야기들이 그리 많은지...

 은희경의 작품은 한 마디로 내 스타일과 많이 닮았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한참 건방진 인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것 같아서 말을 고쳐본다.  은희경은 내가 추구하려는 방향으로  먼저 뻗어나가고 있는 작가다, 그것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냉소와 반어적인 방법으로 심리묘사를 하며  적절  한 비유를 끌어내어  탄력있게 문장을 끌어가고 있다. 냉소라면  나도 과거에 '한 냉소' 했었다.

 내가 아직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은희경에 비해 끈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비교는 모든 작가들(잘난 작가, 못난 작가, 형편없는 작가)과도 비교  된다. 나는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끈기와 추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늘 아마추어이기도 한 것이다. 이건 어쩌면 이 시대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 적자생존의 이치를 공포로 체험하고 있는  나의 나약함과도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 나는 대뜸 로제 그르니에의  [카리아티드]를 생각했다.   카리아티드라는 이름을 가진 정신요양원에 아내를 보내는 남편의 이야기인데 초반부에, 요양원에 가는 첫날 아침  모니크와 쟈크라는 두 부부가 나누는  대화가 가느다란 현처럼 섬세하게 울리는 맛이 있어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나는 그 글을 읽고 눈물을  흘  렸었다.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흔한 말로 심금을 울리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슷한 종류의 이별을 모티브 삼아 글을 썼다. 그러나 글이 30매를 넘어섰을 때  그것을 입력해 놓은 286 컴퓨터가 고장이 났고, 디스켓에 옮겨 놓지 못한 실수가 겹쳐 나는 그  작품을 온전히 날려보냈다. 나는 한 줄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림은 떠오르는데 심혈을 기울인 문장은 한  줄도 생각나지 않았다. 봄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이별을 준비하는 새벽의, 현이 울리는 듯한 심리묘사...   남들은 그까짓 30매에  쩔쩔맨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그 30매가 마의  선이었다. 평균 100매의  단편을 쓸 경우 30매는 겨우 3분의 1에  해당하지만 그 3분의 1을 마음에 들 때까지 수 십 번 고치지 않고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 나의 성격이었다. 복선과 암시와 심리의 배경들을 딴에는 교묘하게  감추려는 노력을 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버리고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명작이 될 뻔한 작품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은희경의  이 작품을 읽자마자 곧바로  며칠 전 읽다만 [새의 선물]을 찾아 내 단숨에 읽어 치웠다. [새의 선물]역시 장편에 손대기 꺼려하는 내 기우를 씻어주었다. 시작부분에서 유지되던 긴장감의  밀도가 과거로 들어가면서 약간 흔들리기는 했지만 장편에서 흔히 노출되는 느틴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을 빌려 준 친구는 은희경의 작품에서 소재의 빈곤을  느낀다는, 꽤나 작가연한 말을 했는데 나는 작품을 여러 권  읽지 못 해서인지 아직 그런 느낌은 없다. 그리고 또 그 친구는 [아내의 상자]에서 무언  가 확실히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는데 그게 무언지 알수 없다는 것에 대해 불평을 했다. 나는 '감추면서 드러내기‘란 원래 고도의 수법이거든, 하고 그 친구의 불평을 일축했지만 그 친구는 왜 굳이  감추려는 노력을 하느냐는 거였다, 머리 아프게.

 그 친구는 고도의 수법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고 있다. 소설의  첫째 조건인 '재미'에만 충실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이런  표현은 누구를 폄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오히려 그 친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자라는 생각이 들고, 때로는 그것이 부럽게 생각되기도 하는 나에게  주는 채찍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나는 [아내의 상자] 속에 나오는 두 마리의 이웃집 강아지 중 마르고 더러운 강아지 쪽에 가깝다.  그래서 주인집 아들이 아무 것도 주는  것 없이 마른 강아지를 걷어차며 '야, 먹고 살려면 성격부터 고쳐라, 앙?' 하는 이야기가 뼈  아프게 들린다.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공지영


제목이 싫다. 전에  신문에서 광고를 하던 어떤 책의  제목이 [별은 아파도 반짝인다]였는데 그때 느낀 감정과  비슷하다. 일종의 혐오감? 너무 폭력적인가? 아니면 느끼함? 소녀 취향의 감상성? 어쨌든 싫다. 게다가 이혼녀의  이야기이다. 더 싫다. 운동권,  후일담 문학, 이제는 혹시 페미니즘?  공지영은 억울해 할지  모르겠다. 예쁜 얼굴 때문에 여성 독자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작가에게 개성이 있듯이 독자에게도  개성이 있어서일 테니까. 문장이나 구성이나 뭐 그런 것들에서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게는 소녀적 감상보다 더한 유아성의  유치함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거울에 관한 이야기> 김인숙


예전에 같은 운동권 문학으로  분류되었던 작가라도 나는 공지영보다 김인숙의 방식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작품을 읽었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느낌만 기억난다.) 창비에 실렸던  [칼날과 사랑]을 읽었을 때 느꼈던 통쾌감은 아직도 슬그머니 웃음나게 한다.

거울, 건널목, 어머니, 치매, 윤회를 들먹이며 존재와 구원을 얘기하고 있다. 짜맞추기에 무리가  없다. 한시적인 존재에 관해 신선하고도 인간적인  접근이다. 얼핏 김형경의 [세상의 둥근 지붕]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최상은 아니다. 윤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더 이상  안 나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내가 써 놓은  것이 구석에서 시들어 버릴  테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내  작품도 우~ 갑자기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아직 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무리 반도> 박상우


 얼마 전, 일요일 아침에  KBS의 무슨 책방이라는 프로에서 박상우의 [말무리반도]를 보았었다.  책을 읽기 전이었는데, 우연히 보게  된 그 다이제스트 극화는 누구 솜씨인지 정말 엉성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주제가 잡히질 않았다. 그 보다 훨씬 전에 나는 박상우의 또 다른 [말무리 반도]를  읽은 적이 있다. 모 신문의 여행 코너에 작가들이 경험한 잊지 못할  여행기를 싣는 난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박상우의 글을 읽었던 것이다. 청년  시절 막연히 여행을 떠났다가 바다를 만났는데 물이 들어 올 시간인 줄 모르고 바닷가  바위에 올랐다가 하마트면 물에  잠길 뻔 했다는,  뭐 그런 얘기로 기억된다. 그런데 내게는 그 내용이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고 그것을 기둥 줄거리로 삼아 작품을 만드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품은, 내 생각엔 작가가 기필코 수상을 하고야 말겠다는  목적을 갖고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본래의 자기 스타일인 팍팍한  문장에 약간의 물기가 돌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를테면 논리적인  묘사에 서정성을 가미시키려고  애를 쓴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사위원의 비위를  생각해서인지 정통성을 지키려고  고심한 흔적도 보인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을 약화시켜  기존의 작품보다 훨씬  단정한(?) 모양새를 갖추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작품 내용에서 나는 예의 '그러면  그렇지!'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자가 나오고 하룻밤의 정사가 나오고...

 구효서, 윤대녕, 박상우 등의  글에서 빠지지 않는 공통적인 요소는 여행-낯선 여자-여관-정사,  이런 것들이다. 게중에는 정치나  운동권 얘기가 양념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내가 위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조리 읽은 것은 아니어서 단적으로 얘기하긴 어렵지만 내가 읽어 본 몇몇에서의 느낌이 그렇고 다른 독자들에게서 들어본 공통적인 느낌도 그러하다. 

 여자들에게 신데렐라 신드롬이 있다면  이들 작가들에게는 혹시 우렁각시 신드롬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위의 남성  작가들이 표현해  낸 여자들에겐 도무지  현실성이라곤 없다.  조성기의 [우리 시대의 작가(소설가던가?]에 나온  여자들처럼 ‘작가’라면 사족을 못 쓰고 물심양면으로(가만, 앞의 '물'자에 '몸'도 포함되는 건가?) 진상하려는 여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객지에서 만난 여자들이 작가인지 불량배인지도 모를  아무 남자에게 옳타구나! 하고 몸을 허락할 여자들이 도대체 얼마나 된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요는 서로가  그런 분위기에 야합되었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모두 그런  일색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작가들이 항상 그렇게 되기를 꿈꾼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작가들은 욕망할 때마다 담배연기로라도 여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우렁각시가 나타나 남자가 욕망 하는  것들을 만족시켜주고 숨어버리듯이.  

 최수철의 작품에서도(제목은 생각 안 남) 객지에서 낯선 여자와 정사를 나눈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최수철의 것에서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눈을 떠 보니 머리맡에 던져진  콘돔에 개미들이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라는 자극적이고 괴기스럽고, 과학적(?)인 표현 때문이  아니다. 며칠 동안 씻지  않은 여자의 몸에서  냄새가 심하게 났다는 야박한 표현 때문도 아니다. 최수철의  작품에선 그런 것이 어쩌다  있었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심리)에 내(독자)가 빨려 들어가 동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작가들의 작품  줄거리를 제한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독자나 자신의 취향대로 글을 읽을 수 있듯이, 작가들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나마 애정이 있는 독자이니까 사탕발림을 하지 않고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기억나는 글을  하나 적어 놓겠다. 

 

  모든 픽션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충동, 즉 일상생활을  모방하려는

  충동과 그것을  초월하려는 충동이 있다. 이  어느 편의 충동도  전혀

  포함하지 않은 어떤 만족스러운  문학작품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길리안 비어의  로망스 중에서-



최수철의 <매미>까지  읽고 싶은데 내일 아침  일찍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다. 한  이틀 일하면 일 주일은 살수 있을  것이다. 잠 좀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