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래리 플랜트><억수탕>을 보고 -장혜숙- |
아엠 어 휴머니스트 오래간만에 냉장고가 꽉 찼다. 몇 달 동안 달랑달랑한 식량에 마음 을 졸이며 살았는데 한 일 주일은 도시락 반찬도 문제없을 것이다. 넉 달이나 밀린 공과금도 대충 처리했고, 오라는 데도 없으니 킬링타임용으로 비디오나 볼거나. 표제가 되어버린 <래리 플랜트>나 <억수탕>은 사실 아무런 연관 성이 없는 것이다. 주인이 몇 차례 바뀌는 동안 자꾸 허술해지는 동네 비디오 점에서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겨우 낙착을 본 것일 뿐 이다. 피같은 돈을 주고 빌려서 돈 아깝고 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려면 선택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미리 영화에 관한 정보들 을 수집하고 내 취향에 맞는 영화들을 체크해 놓기도 하지만 나는 항 상 내가 보려던 영화를 제대로 찾아 본 적이 없다, 이른바 예술성이나 작품성이 있다는 그런 것들은 가게 주인에게는 기피해야할 목록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그런 옹색한 가게에서 가끔은 쓸만한 것들 을 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번에 본 것들이 쓸만한 것의 수준에 닿아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순히 킬링타임용으로 보기엔 아깝다는 얘기이지. 특히 <억수탕>은 지난번에 극장에서 본 <편지>의 그 한 국영화에 대한 실망감을 만회해 주었다. <편지>는 다행히 내 돈을 주고 본 것은 아니어서 돈 아깝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만(돈 내준 사 람이 보면 기분 나빠할라)시간은 아까웠다. 광고전략에 속지 않으려 고 베스트 셀러라면 우선 밀어놓는 성격인데, 관객 몇 십만 동원 운운에 혹시나 하고 친구에게 극장 가자고 졸랐더니...... 으으, 최진실의 그 가증스런 표정연기, 최진실은 아주 극히 작은 몇 가지의 표정만으 로 연기자 노릇을 한다. 다양한 캐릭터를 한 두 가지의 예쁜 표정 안에 가두어 놓는 대단한 배우다. 무릇 연기자라면 흉하게 일그러진 모습까지 제대로 표현해야 하는데, 최진실은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엉엉 우는 모습도 잉잉 우는 모습으로 느끼게 한다. '나, 예쁘지? 나, 귀엽지?' 하는 듯이. 옛날의 한국영화를 보면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무언가(예를 들어 어린 아기)를 빼앗기고 그것(자동차)을 좇아가다 넘 어지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대개의 여배우들은 다리를 모으고 아주 예쁘게, 무슨 모델이 앉은 자세처럼 넘어진다. 그러나 엄앵란은 고무신짝이 허공을 날으도록 튀어나와 아주 흉하게 엎어질 만큼 몸을 내던진다. 그때 그런 장면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야, 참 정말 배우답다, 하던 기억이 난다. <래리 플랜트>는 영화 포스터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광 고카피 또한 자극적이었는데, 그러나 비디오를 보면서 또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 평을 보고 상상했던 내용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광고에 속은 건지 편집에 속은 건지는 알 수 없다. <래리 플랜트>는 얼핏보면 포르노그라피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기 도 한데 나는 아직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정의와 한계를 알 수 없으므로 여기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싶다. 그것을 뺀다면 이 영화는 표현 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대단한 투쟁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엄청난 상업주의이다. 주인공 래리가 법정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건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고 선택의 자유를 입증하 기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장사꾼의 끈질긴 흥정으로 보인다. 장사꾼 기질을 한 단계 높여 말하면 사업가의 수완이 된다. 실제로 그는 어릴 때부터 밀주를 만들어 팔만큼 장사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기피했던) 것을 상품 으로 발전시켰고 그것으로 엄청난 부를 얻자, 자신의 더러운 장사(그 는 이것을 정직한 장사라고 생각한다.)를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그건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산다는 우리 속담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적 당히 혼합된 서구적인 방법으로 실천한 것에 불과하다. 산타 클로스나 오즈의 마법사, 심지어는 종교인까지 장사(도색잡지)에 이용해 먹 을 수 있다는 것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개인의 정직성이고, 그럴 수 도 있다고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다(자본주의는 마르 크스나 레닌도 인형으로 만들어 팔아먹을 수 있다나?). 그는 도덕으로 감추어진 성의 정직성을 파내어 그것으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그렇게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장사꾼 기질 때문이다. 장사꾼에게 필요한 건 도박성과 막가파 정신이다. 일단 성공해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막가 파 정신도 그럴 듯한 경영철학으로 포장할 수 있고 도박성은 뚝심이 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철저히 남성위주, 혹은 힘의 논리를 적용시켜 여 성의 상품화를 정당화시켰다.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짓눌려 있던 남성(혹은 인간)의 본능을 정직하게 해방시킨다는 명분아래 여성의 상 품화를 너무도 당연하고 정당하게 여기고 있다. 래리의 부인인 그 여자가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것은 결코 아닌데, 그 여자의 천박함이 남성들에게는 성의 솔직함으로 여기게 그려진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래리의 성공(?)에는 그 여자가 바탕이 된 부분이 많은데 그 여자는 결국 자신의 퇴폐성과 래리의 투쟁으로 인해 심신이 망가져서 목욕하러 들어갔다가 목욕물에 빠져 죽는다. 왜,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는 남자를 성공시킨 대가로 여자가 죽어야 하는 걸까. 물론 이 영 화는 실화이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라고 볼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난을 받던 남자 주인공이 성공을 하게되면 그것 을 도왔던 여자는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거개의 남성작가들 은 허구로라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여성의 희생을 필요로 하고 그걸 낭만으로 위장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실화를 각색한 영화에서도 그 런 것을 느끼게 하는 건 힘없는 자의 과잉반응일까 아니면 만성적인 힘의 중독에서 깨어나고 싶은 몸짓일까?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멘트에 래리는 현재 출판업자로 활약 중이고 포르노를 반대했던 아무개는 금융대출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은 20억달 러가 넘는 손해를 안고 있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것이 시사하는 것 은 도덕자연 하던 아무개는 결국 미국에 손해를 안겨주었지만 억압된 성을 자연스럽게 해준 래리는 아직도 29개의 잡지를 출간하며 사람들 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니 도덕자연 하는 그 아무개는 결국 비도덕적 이었고 해로운 인물이었다는 뜻도 된다. 내가 보기엔 그 도덕자연 하던 사람은 자기 사업에 실패한 것뿐이다. 래리 만큼 장사꾼 기질이 없었다는 얘기다. 만일 래리가 술과 여자가 아닌 다른 사업을 벌였다 면 얼마큼 성공했고 얼마큼 돈을 벌 수 있었을까. 그는 타고난 장사 꾼 기질로 상품선택을 잘 한 것이다. 남들이 손을 안 대는, 차마 아이 디어를 생각해 낼 수 없는 음성적 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많은 남성들 의 본성을 바탕으로 마케팅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결코 표현의 자유를 얻어낸 투사가 아니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어떤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할 때에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으로서 부를 원치 않는다, 명예도 원치 않는다. 사랑도 원치 않는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성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포르노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의 안 볼 자 유 역시 보호되어야 한다. 인간의 다양성을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 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휴머니즘의 기초가 되지 않을까? <억수탕> 시간이 덜 아까웠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몇 안되는 한국영화중의 하나. 그 몇 안 되는 한국영화는 <개 같은 날의 오후>, <비트>, <넘버 3>, <내일로 흐르는 강>, <청송가는 길>, 등이다. 감독과 배우에 관한 터치는 피하고 싶다. 평론가가 아니므로 조목조목 따지기보다는 아마추어의 소박한 느낌만 말하고 싶다. <억수탕>은 종합예술인 영화적인 묘미보다 소설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내가 영화에서 소설을 느낀 작품은 대만 영화인 <애정만세>, 프랑스(?)영화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또 몇 있을 것 같은데 당장 생각이 안 난다. <억수탕>은 어쩌면 반 포르노그라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 많 은 누드를 보면서도 외설스런 느낌이 전혀 없다. 제 몸을 팔아서까지 누드에서 예술을 시도해보려던 사진작가도 결국 억수탕의 누드에서는 예술보다 더한 무엇( )을 느끼고 자신이 애써 만들었던 작품을 버린 다. 그 무엇에 대한 설명은 구체적이지 않고 관람자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소설의 결말이 작가보다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려는 전략과 흡사하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무리 없이 자연 스럽게 넘어가서 놀랄 지경이다. 아니, 저렇게 슬그머니 휴머나이즈하 게 넘어갈 수 있다니? 시나리오 작가의 느낌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진 않았지만 뚱보 소년과 왜소한 체격의 때밀이가 다정한 부자지간이었 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느꼈던 인생살이의 분노를 정화시키는 눈치이 다. 약간은 가벼운 듯 하면서도 표현의 재치와 메시지의 의도가 섬세 한 작품이다. 980212 |
'Movie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어/김기덕 (0) | 2007.01.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