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김재진의 시(들)

푸른얼음 2007. 1. 4. 14:56
 

 1. 밤이니까 - 김재진

울어도 돼.밤이니까.


울긴 울되 소리 죽여


시냇물 잦아들듯 흐느끼면 돼.


새도록 쓴 편지를 아침에 찢듯


밤이니까 괜찮아 한심한 눈물은 젖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넋나간 모습으로 앉아 있거나


까마득한 벼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아아 소리치며 뛰어 내리거나


미친 듯 자동차를 달리거나


무슨 상관이야.


사람들의 꿈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문득


부러진 연필심처럼 버려진 채


까만 밤을 지샌 들 무슨 상관이야.


해가 뜨면 그 뿐


밤이니까 괜찮아.


말짱한 표정으로 옷 갈아입고


사람들 속에 서서 키득거리거나


온종일 나 아닌 남으로 살거나


남의 속 해딱해딱 뒤집어 놓으면 어때


떠나면 그뿐.


가면 그뿐인데.


밤에는 괜찮아, 너 없는 밤엔 괜찮아.





2.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 - 김재진

    

마음속에 한 여자가 있네.


비가 와도 떠내려가지 않는 여자

가끔은 마음속에

졸졸대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 들리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버린 세월.

침묵이 두려워 지나간 유행가나 불렀네.


아무도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

변하지 않는 건 슬픔밖에 없네.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는 건

슬픔 밖에 없네.


마음속에 한 여자가 살고 있네.


바람이 세차도 날려가지 않는 여자

그 여자의 마음속에 나는 없네


  




3. 고래를 기다리며 -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4. 나무 - 김재진

문득 눈앞의 세월 다 지워지고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수첩 속에 빽빽하던 이름들 하나같이

소나기 맞은 글씨처럼 자욱으로 번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세파에 치여 각양각색인

남루 또한 지나간 상처마냥 눈물겹고

서 있는 사람들이 한 그루 나무처럼

이유없이 그냥 아름다울 때 있다.

가파른 세월이야 지나면 그뿐,

코끝을 감고 도는

한 자락 커피 향에 두 눈을 감고

비 맞는 나무처럼 가슴 적시는

무심한 몸놀림이 아름다울 때 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다 >


 5. 너를 만나고 싶다 - 김재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려 둔 금 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여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6.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1 - 김재진

한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그때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

용서할 수 있으리.


자존심만 내세우다 돌아서고 말던

미숙한 첫사랑도 이해할 수 있으리.


모란이 지고 나면 장미가 피듯

삶에는 저마다 제 철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찬물처럼 들이키리.


한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나로 인해 상처받은 누군가를 향해

미안하단 말 한마디 건넬 수 있으리.


기쁨 뒤엔 슬픔이

슬픔 뒤엔 또 기쁨이 기다리는 순환의 원리를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너에게 말해 주리.




7. 아름다운 사람 - 김재진

    

어느 날 당신의 존재가

가까운 사람에게 치여 피로를 느낄 때

눈감고 한 번쯤 생각해보라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무심코 열어두던 가슴속의 셔터를

철커덕 소리내어 닫아버리며

어디에 갇혀 당신은 괴로워하고 있는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두렵고 낯설어질 때

한 번쯤 눈감고 생각해보라

누가 당신을 금 그어놓았는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가리고 분별해 놓은 이 누구인가


어느 날 당신의 존재가

세상과 등 돌려 막막해질 때

쓸쓸히 앉아서 생각해보라

세상이 당신을 어떻게 했는가

세상이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어느 날 당신의 존재가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초라해질 때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용서하라

용서가 가져다줄 마음의 평화를

아름답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



8.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呂)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듯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9. 행복 - 김재진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는 나무처럼

사람들 속에 섞여 고요할 때

나는 행복하다


아직은 튼튼한 두 다리로 개울을 건너거나

대지의 맨살을 발바닥으로 느낄 때

만지고 싶은 것

입에 넣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하나 없이 비어 있을 때

행복하다

가령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어깨에 닿고

한 마리 벌이 꽃 위에 앉아 있는

그 짧은 세상을 눈여겨 보라

멀리 산 그림자 조금씩 커지고

막 눈을 뜬 앵두꽃 이파리 하나 하나가

눈물겹도록 아롱거려 올 때

붙잡는 마음 툭, 밀어 놓고 떠날 수 있는

그 순간이 나는 행복하다 


 10. 비 맞는 나무 - 김재진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비 맞는 나무는 비맞는 나무다.

온종일 줄줄 흘러내리는

천상의 눈물을 온 몸으로 감수하는

비 맞는 나무는 인내하는 나무다.

모든 것 다 용서하신 어머니같이

비 맞는 나무는 다 받아들이는 나무다.

온통 빗속을 뚫고 다녀도

날개에 물방울 하나 안 묻히는 바람처럼

젖어도 나무는 젖지 않는다.

세속의 번뇌 온몸으로 씻어내려

묵묵히 경행하는 수행자처럼

맨발로 젖은 땅 디디고 서 있는

비 맞는 나무는 비 안 맞는 나무다. 


 11. 민들레 - 김재진

날아가는 홀씨는

민들레의 우주다.

꽃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별이 있다.

꽃은 다 우주다.

걸릴 데 없이 만행하는

꽃씨는 불성이다.

천지간에 만개해 있는 식물의 불성

꽃이 피어도 사람들은 꽃 핀 줄을 모른다.

날아가는 꽃을 봐도

별빛인 줄 모른다.


]12. 언제나 너는 멀다 - 김재진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을 너는 느낀다.

알 수 없는 너의 느낌

나처럼 너 역시 나를 알 수가 없다.

노란 햇살이 현기증처럼 퍼지고

골목마다 차들이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온다.

가까이 있지만 너는 언제나 멀다.

오래된 대문을 소리내어 밀며

주저앉아 울먹이는 봄날의 상실

흙 한 줌 찾기 힘든 바닥을 비집고

햇살보다 노란 민들레가 핀다.

더 이상 나는

너를 견디기를 포기한다.

포기한다는 것은 삶과의 타협

다 그런 거야.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마.

모르는 척 있는 거야 그저.

삶의 이치에 익숙한 듯

앞서서 가고 있는 너

마음아 너는, 마음아 너는...

등 돌린 사람에 길들여지는

새로운 인간관계에 안착한다.

붙들지 못한 마음 좇아 사방팔방 뛰다니는

또 다른 마음이 겪는 행로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나는 정말

알 수 없는 모양이다.


13. 세월 - 김재진

    

살아가다 한 번씩 생각나는 사람으로나 살자.

먼 길을 걸어 가 닿을 곳 아예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의 젖은 자리 외면하며 살자.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던 세월.

먼 바다의 끝이 선 자리로 이어지듯

아쉬운 이별 끝에 지겨운 만남이 있듯

모르는 척 그저 뭉개어진 마음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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