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박정대의 시(들)

푸른얼음 2007. 1. 4. 14:58
 

1.  自序


아무리 마셔도 목마르고,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나는, 사막이다

사막의 무사이다

거기다 이제는 눈까지 멀어

음악만이 나를, 자꾸만, 어디론가, 끌고 간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것이

지금까지의 삶이었다면

이제는 끌려가면서도

맹글어지는 것이

내 삶이고

시 나부랭이고

의무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나는, 여전히 사막이다

사막의 음악이다

 



2. 눈, 눈을 감고 白夜를 노래함



하염없이 눈이 내리네

겨울이 늦게 오니까 눈이 먼저 내리고 있네

죽음은 풍경 속의 개들처럼 늘 삶보다 먼저 오네

새벽 두 시에 깨어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네

눈은 몇 사람의 이름과 기억해야 할 몇 개의 순결로 내리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은 내 안의 사막과 길들이었네


세상의 모든 길들 틔우며 처음 보는 눈이 내리네

아주 먼 곳으로부터 달려온 것이어서

지금은 비애조차도 아름다운 눈들의 밤

눈들의 밤, 하품도 잊은 신성한 시간 위로 눈은 내려

하염없이 쌓이고 쌓여서

내일이면 젖어서 펄럭일 내 영혼의

새들의 날갯짓 위에 빛나는 은빛 사랑



3.『뼈아픈 후회』중에서



나는 진실로 단 하나의 사랑만을 원하였으나,

나 스스로 나를 사랑하지 못했으므로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언덕이 있었고 그 비탈진 언덕에서 나는 여러 번 굴러

떨어졌으므로, 그 상처를 위로받고 싶었을 뿐.

너의 따스한 입술로 내 속 깊은 상처를 위로받고 싶었을 뿐.

너의 상처를, 그 상처의 푸른 무덤을 다만 위로하고 싶었을 뿐.



외부를 향한 고통이 스스로의 내부를 향해

그렇게 아득한 하나의 향기로 익어갈 때,

문득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고, 너를 갖고 싶고


 



4. 어느 맑고 추운 날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옹기 위에

옥잠화가 심어진 토분을 올려놓아 보네

맑은 가을 하늘 어딘가에

투명한 여섯 줄의 현이 있을 것만 같은 오후

생각해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

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

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

왜 나에게 와서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

안타까워지는 이 오후에

햇살과 바람이 연주하는

내 기타 소리는 너무나 낡고 초라하지만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직직 끌며

온몸으로 그대에게로 가네

이제는 떠나지 못하게

오래된 옹기 위에 묵직한 토분을 올려놓으며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네

그대는 옹기, 나는 토분

이렇게 우리 옹기종기 모여

추운 한 시절 견디며

킬킬대고 있네

햇살 두툼한 오후를 껴입고 나와 앉아

옹기 위에 토분을 올려 놓으며, 근사하다고

우리의 삶도 이만큼 근사해졌다고




5.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나 집시처럼 떠돌다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걸어왔는지

바람이 깎아놓은 먼지조각처럼

길 위에 망연히 서 있었네

내 가슴의 푸른 샘물 한 줌으로

그대 메마른 입술 축여주고 싶었지만

아, 나는 집시처럼 떠돌다

어느 먼 옛날 가슴을 잃어버렸다네

가슴속 푸름 샘물도

내 눈물의 길을 따라

바다로 가버렸다네

나는 이제 너무 낡은 기타 하나만을 가졌네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한다네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기타의 목덜이를 어루만지면

가응 가응, 나의 기타는

추억의 고양이 소리를 낸다네

떨리는 그 소리의 가여운 밀물로

그대 몸의 먼지들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이 먼지 나는 길 위에서

그대는 한 잎의 푸른 음악으로

다시 돋아날 수도 있으련만

나 집시처럼 떠돌다 이제야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홀로 걸어왔는지

지금 내 앞에 망연히 서 있네

서러운 악보처럼 펄럭이고 있제

 



6. 우편함 속에 사랑을 - 박정대


창 밖에는 노을이 밀려오구요

燒酒 한잔 생각만 간절하구요

바람에 섞여 소문들 흘러가네요

나는 앉아서 늙어만 가요

내 눈꺼풀의 창문은 어둡고 쓸쓸해

자전거를 타고 가던 당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요 떠가는 염소구름도

이제는 보이지 않아요

나는 지금 추억 안에 서서

거리의 나무들과 함께

걸어가네요 

거리는 이미,

하늘로 통하는 동굴의 입구 같은

별들이 무수한 길들을 만드는 밤이구요




7. 馬頭琴 켜는 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악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 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었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대청산 자락 너머 시라무런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隊商들처럼

어둠은 검푸른 초원의 말뚝 위에 고요와 별빛을 매어두고는 끝없이 이어지던 대낮의 백양나무 가로수와 구절초와 민들레의 시간을 밤의 마구간에 감춘다 은밀히 감추어지는 生들


나도 한 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랜 해방구인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조리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넣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 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 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창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아 갈증처럼 여전히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처럼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을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이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마두금-악기의 끝을 말머리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현을 가진 몽골의 전통 현악기.

 



8. 버찌   


허공의 경계선을 지나

운석처럼 버찌들이 떨어진다

저들이 태어나 한 생애를 견디고

끝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한 점 핏방울로 맺히는

망명점. 북반구 유월

기억나지 않는 생애



저 너머로,

지가 그 무슨

열혈남아라도 되는 양

핏빛으로

버찌가 떨어진다


이해받지 못한

울음 덩어리의 생(生)




9. 아이다호 - 박정대


아무데서나 나도 팍 쓰러지고 싶었다


화염에 휩싸인 채 흘러가는 구름들, 들판 위의

집들 빠르게 빠르게 하늘을 건너갈 때

누군가의 깊은 한숨이 마리화나의 새떼를 날릴 때

날아가는 새떼들 위로 쏟아지던, 화염방사기 속의 여름

나는 아무데서나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었다 하늘에서

참새구이들이 투툭 떨어져, 소주병 속으로 떨어져

푸른 정맥 속에서 하나의 길이 예감처럼 솟구쳐오를 때


사랑을 잃고 나는 걸었네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네

추억이 페달이었네 폐허와

폐허와 폐허와 또 다른 폐허

속에서 푸푸

푸른 현기증이 나도, 페달을 밟으면서

길 옆으로는 가기도 잘도 갔네 아 하면

아이디 아이다 호호호, 푸푸푸 하면서

세월이 갔네 아무데서나

사랑을 했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쓴 것이 몸에는 좋다네


내용출처 - 박정대, <단편들>, 세계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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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다들 돌아가버린 한적한 오후의 도서관에서


내가 생애처럼 긴 담배를 피워물 때


어디서 작은 새들이 날아와


처음 보는 이름으로 움직이고, 꽃들은


낡은 외투에 손을 꿰는 아이들의 손끝마냥


불쑥 피어오르고 있었다, 외상값


정리되지 않은 외상값에 대한 생각처럼


나는, 그 어떤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집요한 상념에 잠기어 있었는데, 비가 내려


내 생각의 한가운데로 비가 내려,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하늘 한구석에서


누군가 또 낚시질을 하고 있군, 글쎄


비 내리는 오후는 저녁처럼 어두워져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두운 하늘에 검은 말 한마리


지나가고 있었다, 저기 저, 비에 젖은 별들은


진흙탕의 세우사풍(細雨斜風)을 지나온 시간의 말발굽이야.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잔인한 추억이지 뭐


나는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나지막한 속삭임에게 들려주었다


다 잔인한 추억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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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신이


어느 날 참 많이 어두워져서


그때부터 음악 소리 들린다면,


그것이 바로 내 이름이다.



10. 열두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1) 8 인치의 강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 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있지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냥 마음에 떠오르는대로 불러다오.


당신이 오래 전에 있었던 어떤 일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면,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당신은 그 대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아주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아니면 어떤 이들이 당신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했다.


당신은 그렇게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이 한 것이 틀렸다고 말했다.


<잘못해서 미안합니다> 하고서, 당신은 다시 뭔가를 해야 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이 아이였을 때 했던 놀이이거나,


아니면 당신이 늙어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마음속에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어떤것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당신은 어떤 강물 속을 응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당신 가까이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악 당신을 만지려 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 하기 전에 그걸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혹은, 당신은 아주 멀리서 어떤 이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메아리에 가까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당신은 침대에 누워 거의 잠들려 하고 있었는데,


하루를 끝내기에 아주 좋은, 뭔가, 혼자 하는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혹은 당신은 뭔가 맛있는 걸 먹고 있었고,


자기가 뭘 먹고 있는지를 잠시 잊어버렸지만,


그러나 계속 먹으면서, 그게 맛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그건 자정 무렵이었고,


그리고 스토브 안에서 불길이 弔鐘처럼 울리고 있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혹은 당신은 그녀가 당신에게 그 일을 얘기했을 때


좋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걸 다른 어떤 사람에게 얘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녀의 문제들을 잘 아는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쩌면 송어들은 깊고 잔잔한 곳에서 헤엄쳤지만,


그러나 그 강은 겨우 8인치 너비였고,


달이 아이디아뜨를 비치고 있었고,


그래서 워터멜론 들판은 걸맞지 않게 어둡게 빛을 발했고,


그래서 모든 초목들로부터 달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2) 사천의 천사


당신은 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천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길 위에서 길 위로 하염없이 떠날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정말 <길 위에> 있었고,


당신은 아마 천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때 천사에게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3) 눈물도 음악이 될수 있다면


밥 딜런의 노래 듣고 싶어,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42번 국도를 지나왔다.


지나오는 길에도 생은 내 갈비뼈 사이에서 푸른 잎들을 꺼내어


필사적으로 사랑을 흔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


난 참으로 오래간만에 음악을 들은 것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4) 만항재


아무리 달려도 이정표가 나타나지 않아 뒤돌아보면


좁은 산길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나무들의 물결.


허공의 바다를 털털거리며 지난다.


갈매기 한 마리 날지 않는 이곳은 전생에 무슨 바다였나.


길이 좁아질수록 생각들은 날아가고,


길이 험해질수록 더욱 깊어지는 그리움의 계곡.


엄나무들은 엄숙하게 머리를 길렀지만


식솔들 이끌고 산 중턱까지 와서 정착한 낙엽송, 참나무 이주민들.


아무리 달려도 너에게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아


어느새 다다른 하늘 밑,


침묵은 끝나지 않고 바람 끝에 매달려 와서


끝내 만항재, 해발 1,330미터라고 씌어진 곳에서


불어가는 음악, 페루, 나비, 바람.


그것이 내이름이다.




(5) 음악, 페루, 나비의 경계를 지나서



오래도록 꿈꾸던 것, 그것을 나는 만항재에서 본다.


만항재는 음악과 페루와 나비의 경계선.


이 경계선을 지나면 음악만이 남을 것.


그때부터 나는 눈을 버리고 음악을 얻을 것.


그리고 당신이 어느 날 참 많이 어두워져서


그때부터 음악 소리 들린다면,


그것이 바로 내 이름이다.




(6) 만항 이야기


만항이라는 곳. 이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집들이,


주인 잃은 배들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곳.


석양이, 열 두 개의 촛불처럼 타오르는 곳.


허공에 매달린 항구, 만항을 지난다.


집들이 산비탈에 걸려, 컹컹거리며 짖고 있다.


내 어릴 적 검은 판자의 하늘이, 허공에 걸려 나부낀다.


이것도 강원도식 風磬이라면 풍경인곳. 만항이라는 곳.


그것이 내 이름이다.




(7) 밤의 비탈길에서


만항 마을 지나, 저 속세로, 자장 율사가 창건한 정암사 찾아가는 길.


낮에, 자장면 한 그릇 먹고 그대 진신사리 찾아가는 길.


하산할수록 더욱 어두워지는 꿈.


양파처럼 별들 흩뿌려지는 밤의 비탈길에서,


텅 빈 그릇처럼 캄캄해져 오는 밤에서,


강원도라는 섬에서 잠들지 못한 산짐승들은


달빛을 향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8) 다시 만항 이야기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나는 중얼거린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두워질수록 나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대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이야기 속의 모든 것들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어지럽지 않다. 견딜 수 있다.


내가 아픈건 네가 아프기 때문이다.


갑자기 숲의 음악 소리가 커졌다.


바람이 아프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바람의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나무들이 아프기 때문이다.


누군가 끊임없이 술잔을 비운다.


술잔 밖 세상이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럽지 않다. 견딜 만하다.


그러나 네가 아픈건 내가 여전히 아프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9) 또다시 만항 이야기


체, 체, 체, 게바라의 바람이 분다.


쿠바의 풀잎들은 여기에 없다


만항의 오래된 바람이 분다.


내가 하염없이 신생을 꿈꾸며 떠난 여행길에서도 오래된 기억의 바람은


허공의 갈피갈피에서 나를 덮친다.


내가 만항을 지났던가.


나는 깊은 산속 어지러운 굴헝을 헤맨다.


쿠바의 풀잎들은 여기에 없다.


체, 체, 체, 거봐라, 혀를 차며 만항의 오래된 바람이 분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10) 밤의 여행자들


당신은 사는게 힘겨워져 밤마다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 밤을 따라서 한없이 달려가다 보면 누군가를


혹은 당신이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동안에도 천사들은 쉽게 나타나지 않고,


당신은 수없이 촛불을 꺼트려야 했다.


촛불이 꺼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당신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자신의 몸을 더듬어 길을 내고,


새롭게 이 세계의 지도를 그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당신이 숨쉬는 매 순간의 공기들이 너무 답답해


어디론가 떠나려고 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허공에다 당신은 매일 간절한 키스를 한다.


그 입맞춤이 대지의 가슴에 닿아


그곳에서 아름다운 나무들이 태어나기를,


그 나무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느 날 당신은 창밖에 환하게 핀 앵두꽃을 보고


밤이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았다.


당신은 그 꼿을 보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때로는 음악이 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매일 밤마다 촛불을 켜 들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11) 천사들


숲에 가면 나뭇잎마다 천사들이 산다.


그 천사들은 당신의 한숨 속에서 태어났다.


당신이 매 순간 허공으로 천사들을 날려보낼 때마다,


당신은 또 하나의 촛불을 꺼트리고 있는 셈이다.


숲에 가면 나뭇잎마다 유배당한 천사들이 산다.


천사들은 나와 입맞추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것이 내 이름이다.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불꽃으로 나는 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산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불꽃의 線, 끝없이 움직이는, 일렁이는 발광하는 生


그것이 내 이름이다.




(12) 달과 하나의 촛불이야기


나는 열 두 개의 촛불을 다 꺼트리며 벽파령에 올랐다.


벽파령은 깜깜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이름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열두 개의 촛불이 다 꺼진 다음에야


가까스로 타오르는 하나의 거대한 촛불을 보았다.


그것은 달이었다.


달은 서서히 숲들을 지나 나에게로 왔다.


나는 달에게 나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달은 다만 내가 잃어버린 열두 개의 촛불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내 이름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11. 나 자신에 관한 調書/ 박정대


1

일찍이 나는 떠도는 하나의 섬이었다, 눈물의 망망대해에서 보면


2

살아있다는 느낌--고요함이 나를 찌른다, 나는 살아있다


3

죽은 자들의 책 속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난다


4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의 오랜 세월이 작은 혁명을 완성한다


5

나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이 글을 쓴다


6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시간의 마차는 사라져간다


7

나는 자살한다, 남들에게 무익하니까, 나 자신에게 위험하니까


8

다시 생각해보아도 정열은 부질없는 것


영혼과 육체는 처음부터 일치할 수 없었던 것


10

밤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내 두통의 원인이었다


11

거미들은 새벽에도 왜 외롭다고 소리치지 않는 것일까


12

광기가 나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내가 광기를 완성하리라


13

눈에 보이는 것들의 불가사의 --그 속을 꿰뜷어본다


14

불가사의한 것들이 우리를 끌고 간다


15

나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겠다, 움직인다는 것은 외로운 것이다


16

산다는 것은 물론 표현한다는 것과는 어느 정도 반대되는 것이다


17

이 밤에 잠들지 못하고 펜을 움직이는 내 손이 저주스럽다


18

정신이 타락하면 육체는 몰락한다


19

그러나 몰락한 육체 속에서 정신이 꽃피는 경우도 있다


20

위대한 작가는 작품 속에서 스스로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다


21

겨울은 우리를 따스하게 한다, 그것은 정신의 힘이다


22

패배하지 않는 정신의 힘---나는 그것을 믿는다


23

의미 있는 침묵이란 정당성을 획득할 때 가능하다


24

나는 지금 치명적으로 젊다


25

행복이란 단순한 육체노동 속에서 온다


26

나는 지금 유배되어 있다, 어디에 유배되어 있는지 모르는 채


27

추억은 우리들의 등뒤에 서 있다, 푸른 비수처럼


28

담배를 피운다, 눈이 쓰리다, 눈물이 반드시 슬픔의 형식은 아니다


29

언어는 육체다


30

시인이란 인생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시인한 사람들이다


31

외로움은 표현으로부터 온다, 욕망이 생으로부터 오듯이


32

階段이라는 말속에는 정말로 몇 개의 계단이 있는 것 같다


33

폭력이란 외로움의 극단적 자기표현이다


34

극심한 혼돈은 질서에의 열망과도 비례하는 것이다


35

산다는 것은 끝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36

물방울들은 서로의 몸에 경계선을 두지 않는다


37

강물을 바라본다, 흘러가는 것들이 시간이 깊다


38

그대들 안녕하신가, 멀리 혹은 가까이에 있는 섬들이여


39

산다는 것이 때로는 고립 위로 떠오르다


40

불란서와 러시아에 이 밤의 사랑을


41

나는 벌레들을 함부로 죽였다, 그것이 나의 죄다


42

밤하늘의 별들을 모두 셀 수는 없을 것이다


43

또다시 밤을 꼬박 샜다, 오 미친 짓이다


44

열에 들뜬 몸으로 나는 지금 심연으로 가는 길을 안다


45

절망적인 생각들을 몰아내야 한다, 최후까지


46

나는 헛살았다, 라고 중얼거린다, 중얼거리기만 하는 내가 못내 분하고 억울하다


47

왜 이리도 죽음의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가


48

답답하다, 끊임없이 답답하다


49

.......


50

한때 내 영혼의 상류에서 육체의 하류까지 범람하던 사랑이여


51

르 끌레지오--두 개의 계단과 두 개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고독에 관하여 그는 말했다


52

담배 냄새가 역겹다, 나는 문득 생을 토하고 싶다


53

산다는 것을 포기하고 밤새도록 소설 나부랭이들을 읽다


54

살아 있는 정신은 아름답다


55

거미좌의 별들은 참으로 깨끗하게 빛난다, 사글세의 하늘에서


56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딘다는 게 거의 악몽처럼 느껴진다


57

보들레르에게 악수를 청해본다, 그의 퀭한 눈


58

아편복용자처럼 운다, 밤새도록 나의 펜은


59

나는 필사적으로 나의 외로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본다


60

두통이 나를 물어뜯는다, 새벽부터 나의 고통은 시작된다


61

꿈을 꾸기가 두렵다, 두렵다 세상


62

갈 수 있을 것이다, 두통을 넘어서 어디로든


63

갈 수 없을 것이다, 두통이 너무 심하다


64

나의 고통과는 얼마나 무관하게 이 세계는 흘러가는 것인가


65

에잇, 엿먹어라 세상!


66

너는 날씨 속에 있다, 아주 천박한 날씨 속에


67

작은 새들이 지구를 물고 또 내 방 창가로 날아온다


68

하늘을 본다, 새떼들이 지금 윤회의 한가운데를 날고 있다


69

나는 언제나 당당하게 행복의 한복판에서 살고 싶었다


70

가을은 10월을 데리고 방랑자처럼 돌아왔다


71

가을은 또 11월을 데리고 부랑자처럼 떠돌 것이다


72

무위여, 파도는 한없이 부서지며 또한 무수한 바다를 이루었던 것을


73

책, 책, 책, 울며 날아가는 눈먼 박쥐들의 시간


74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나는 감히 글을 쓴다


75

나의 영혼은 지금 시와 소설로 분단되어 있다


76

글 속에 나타나는 위대함이란 절실함 속에서 온다


77

글을 쓸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검열에서 비롯된다


78

상상력이란 무용한 것이다, 무용함이 때때로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79

산다는 것은 하나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것


80

혹은 하나의 문체를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작가들의 삶


81

이 세계는 글로 쓰여진 한 장의 종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82

모든 것들의 내부는 어둡다


83

동물들 속에서 가장 무서운 사랑을 나는 보았다


84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85

나를 이루지 못하고 떠나가는 무수한 외곽의 시간들을 보다


86

자신의 音樂을 발견한 자는 하나의 영원을 획득한 것이다


87

이 세계의 질서는 말에 의해 구축되고 말에 의해 파괴 되리라


88

먼저 쓰고 그리고 사고하라


89

생선들의 뼈, 낡은 부두, 시간, 붉게 밑줄 쳐진 희망, 고장난 시대의, 하역장, 가로수들의, 헌책방의, 세월, 부두의, 갯내음의, 부서진, 목포에서, 목포에서, 바닷가에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고기의, 비늘의, 어둠의, 별빛, 부서지는, 포말의, 비릿한 포말의, 가슴의, 가슴의, 한없이 부서지는 목포에서, 목포에서


90

빌더무우트라는 사나이, 그가 한순간 겪었던 진실에 대하여

그것도 육체의 진실에 대하여 목포는 아직도 말할 수 있다

말이 필요 없었던 바다

그리하여 살고 있었던.

바람과의 일치, 비와의 일치를 말하는 반다의 육체

진실이 육체 속에 일치로 스며 있는 그러한 여인네와

그러한 남자들에 대해 목포는 여전히 말할 수 있다

반다가 살고 있었던 카를로바츠 또는 목포


......


그러한 목포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멀리 있는가


91

나는 때때로 현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92

그곳으로의 망명, 이라고 나는 써본다 너 나 사랑하니, 라고 나는 써본다 새들은 페루를 지나 목포에 가서 죽다, 라고 나는 써본다 장밋빛 노을이 시들면 어둠은 잉크병을 들고 통째로 마시고 있었지 치사량이야, 라고 나는 써본다 너 나 사랑하니, 라고 나는 써본다 그곳으로의 망명, 이라고 나는 써본다 그곳, 아아 너는 혹시 아니 그곳..... 그곳으로의 亡命


93

담배연기, 푸른, 니코틴의 외투


94

푸른 천막, 담배연기, 푸른, 젖은, 깃발, 펄럭이는 영혼의 의혹


95

집착을 버려라, 지구에서 미끄러 떨어지면 우리는 또 다른 아름다운 혹성으로 갈지도 모르니까


96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97

갱지 같은 하늘에는 검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98

나는 나를 부정하는 적의조차 완성하고 싶었다


99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양은 몸서리치며 정오의 꼭대기를 향하여 간다, 떨어진다


100

그대들,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므로 너희는 세계의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