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마르크스 인간과/E.프롬

푸른얼음 2007. 1. 4. 14:24
 

1998년 x년 x일

           

          [마르크스의 인간관]

          E.프롬/H.포빗츠


한 20일 뼈가 물러지도록 방안에서 뒹굴다가 지금은 일요일도 없이 뼈빠지게 일하고 있는 중이다. 일한 지는 한 일 주일 되어간다.

어제는 일을 끝내고 나오다가 세 명이 야합을 해서 모 음식점에 들렀다. 곱창전골로 유명한 그 음식점은 저녁만 되면 무슨 카페테리아나 되는 것처럼 보도에까지 간이 식탁을 마련해놓고 냄새와 분위기로 사람을 끌었다. 전철을 타기 위해 그 부근을 지날 때면 길 건너에 있는 그 음식점에서는 항상 소란스럽고 흥겨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때문에 팔 차선의 넓은 도로 저쪽에 있는 음식점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우리(여자 셋)는 마침 일이 일찍 끝난 것을 기화로 그곳에 쳐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꼬질꼬질한 에프런을 걸치고 곱창전골과 소주 두 병을 시켜 먹었다. 그러나 나는 곱창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야채만 골라 먹었고, 몇 년 만에 먹은 소주 석 잔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주변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나는 술에 취해본 적이 없다. 얼굴이 너무 급속하게 빨개져서 취하기 전에 술잔을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붉은 얼굴로 전철을 탈 수 없어 우리는 또 노래방엘 갔다. 한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붉은 기가 가라앉은 나는 멀쩡한데 얼굴 색 하나 안 변했던 두 사람은 취기 때문에 걸음이 약간씩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지하철역에서 각자 갈 곳을 찾아 헤어졌다. 그리고 혼자가 된 뒤부터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 머리속에서 정리가 안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늘따라 동료들의 분위기가 나를 내모는 것 같은 별스런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럴까?  아, 생각났다. 술을 먹으면서 그 여자들은 나를 ‘백조과’라고 지칭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백수’의 여성형 ‘백조’로 해석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이 ‘고상한 척 하는’ 혹은 ‘우아한 척하는’ (밥맛없는)여자의 뜻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에 두고 있던 평소의 생각을 술김을 빙자해 넌지시 비친 것이었다. 나는 전철 좌석에 앉아 혼자 쿡쿡 웃었다. 재미있다. 내 정체성의 모호함이 정말 재미있다.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다. 아니, 어쩌면 장님나라에선 눈뜬 사람이 병신이듯이 내가 이상한 인간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생각한 옳은 방식을 지키며 살려 하는데 사람들은 내가 자신과 다르다고 배척하고 있다. 적어도 나는 타인의 삶을 방해하거나, 내 방식대로 살라고 강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가 자신들처럼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야유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의 알레고리에 속해 있는 잡다한 것들, 의.식.주.성.소유의식.소영웅주의.스타의식. 뭐 그런 것들을 욕망하지 않는 한 인간에 대해 거의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욕망하지 않는 사람의 눈으로 일반화된 욕망으로 살아온 자신들의 삶이 관찰 당하는 것에 모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이룬 것들이 욕망하지 않는 자의 눈으로 보면 쓰레기나 다름없다는 걸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 그러나 그들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지만 남도 내 방식대로 살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삶의 당위성도 인정한다. 내가 그들과 다른 점은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사고방식과 삶을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이를테면, 나는 타인의 다양한 삶을 인정하고 있는데 반해 타인은 내가 자신과 다르다고 내 삶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의 문제인 것이다.

오늘 인사동에서 만났던 한 사람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내가 아무 말 없이 앉아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말이 없는 것에 대해 무척 부담스러워 하는데, 나 역시 상대방이 부담스러워 하는 것을 보기가 부담스러워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일종의 내 후원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서로 쳐다보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 속을 즐겁게 해줄 것을 찾는 반면 그는 입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찾고 있다. 천상병 시인의 얘기를 나누다가 나는 또다시 이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천상병 시인이 생전에 동문들을 찾아다니며 술 구걸을 했던 얘기를 하며 시인의 삶을 마구 비하하는 것이었다. 작년 여름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이런 차이점에 불편을 느껴 이제껏 만남을 피해왔었다. 그런데 그만 계절이 세 번 바뀌는 동안 그 차이점을 잊어버려 다시 만난 것이다.

역시 사람을 만나는 일은 피곤해... 나는 조금은 황당해하는 그를 종로에 남겨두고 교보로 향했다. 사람에게서 짜증을 느낄 때 책을 보는 것은 최소한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나는 에세이와 시집 쪽은 제목만 훑어보고 소설 쪽에서는 마구잡이로 들추어가며 읽어보았다. 그 떠들썩한 작가와 작품들을 훑어보았지만 나를 끄는 작품은 별로 없다. 그 중에서 그나마 다시 읽어보아야지, 하고 기억해 둔 것은 이승우의 [샘섬]과 김승옥의 소설집이다.  특히 김승옥의 소설은 현대판 고전과 같다.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설계도를 그리는 사람들이 작품활동을 하다가도 가끔씩 석고 데생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소설 쓰는 사람도 가끔씩 김승옥의 소설로 돌아가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러나 나는 김승옥의 소설집을 사는 대신 스위스의 정신의학자가 쓴 [얼굴]에 대한 책과 프롬이 쓴 [마르크스의 인간관]을 샀다. 덕분에 지갑 속엔 전철 회수권밖에 남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인간관]은 마르크스의 이론서가 아니라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입문서이다. 에리히 프롬과 하인리히 포핏츠가 썼고 김창호라는 사람이 옮겼다.

나는 아직 마르크스의 [경제-철학 수고]라는 책을 읽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마, 자도 함부로 입밖에 내지 못할 세대를 살았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마르크스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마르크스의 이론보다도 왜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도 해서 내 흥미를 자극한 셈이다.

프롬은 마르크스 사상의 왜곡에 상당히 분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 마르크스의 목표는 인간의 정신적인 해방이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 제약이라는 사슬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인간적인 전체성의 회복이었고, 인간 스스로 자신의 동료나 자연과의 조화와 통일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마르크스 철학은 현세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언적인 메시아 사상이며, 오히려 그러한 사상적 전통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개인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개인주의 실현이라는 생각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인들의 사고를 지배해 왔다. (P19)

- 마르크스는 결코 인간의 가장 중심적인 동기가 물질획득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서, 마르크스의 본래 목표는 인간의 해방, 즉 경제적 욕망이라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을 회복시키자는 데 있었다. 마르크스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개체로서의 인간의 해방이며, 소외의 극복이고, 개인으로 하여금 인간과 자연에 다시금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주는 데 있었다. 마르크스 철학은 결국, 현세적으로 표현한다면 정신적인 실존주의이며, 바로 이러한 정신의 강조로 볼 때, 물질주의적인 해석과는 대립되는 것이며, 오늘날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유물론적인 철학과도 대립된다. 마르크스의 목표인 사회주의도 결국 그의 인간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본질적으로는 19세기의 일종의 예언적인 메시아 사상인 것이다. (P20-21)

- 서방에서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소련과 중국의 체제야말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체제라고 오히려 선전하면서, 실상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를 곧 소련과 같은 국가자본주의 혹은 중국적인 전체주의로 매도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아직 결정하지 못한 민족들에게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그들 역시 스스로의 체제에 명명하고 있는)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즉 <노예제>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미국과 같은 <자유>와 <자유기업정신>으로서의 자본주의를 따를 것이냐는 식으로 왜곡선전하고 있는 것이다.(P14)

- 마르크스 철학이 왜곡되어 온 데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즉,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 이론을 도용한 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이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듯이 행세해 왔다. 한편, 실제는 어떻든 간에 서방세계 역시, 러시아의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용인하면서, <마르크스의 입장이란 다름 아닌 러시아의 관점과 실천에 반영되고 있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선전해 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만이 마르크스 왜곡의 책임자는 아니다. 개인적 존엄성과 인간주의적 가치에 대한 러시아인 특유의 야만적인 경멸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마르크스를 경제적-쾌락주의적 유물론자라고 왜곡한 책임은 오히려, 반공주의자들이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들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르크스의 계승자들이 자본주의 정신에 너무 깊게 동화된 나머지 현재의 자본주의에 널리 유행하는 경제적 물질적 범주들로서 마르크스를 해석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소련의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적으로서 간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정신 속에서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 결국 그들의 생각으로는 사회주의란 엥겔스가 아이러니칼하게 지적했던 ‘결점이 제거된 현대사회’인 것이다. (P22)

이 책은 계속해서 헤겔과 구분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이라든가 ‘유물론적 방법’,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라든가 소외, 폭력, 노동, 등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이 대학의 교양과목에 포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르크스를 하나의 이론으로만 생각하면 될 뿐인데 왜 여지껏 마르크스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시론에 편승해 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이론은 다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슨무슨 이론주의자는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일찍이 간디가 했던 ‘그리스도는 좋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싫다’라고 한 말과 맥락이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훌륭한 이론, 혹은 종교까지도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고 퇴색되는 것은 다 사람에 의해서이다. 그러니까 ‘~주의’와 ‘~주의자’는 함부로 동격이 될 수 없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그런 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과 그런 주의를 해석하는 것 역시 사람일 테니 여기에 간극의 맹점이 탄생하는 것이리라. 이런 맹점에서 헤어나오기 위한 대안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다만 소극적인 방법으로서의 대안은 ~주의는 받아들이되, ~주의자는 받아들이지 말라는 얘기이다. (가만있자, 이렇게 되면 콜럼버스의 달걀이 되는 건가?) 아무튼 이 책은 고교에서 다루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집에 한 60여 명쯤 되는 동서양의 사상가들에 관한 다이제스트가 있는데 찾아보니 마르크스에 대한 것은 빠져있길래 문득 해 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