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사르트르
1998년 x월 x일
쎄미나를 빙자한 여행을 가기 하루 전날 타박상을 입었다. 얼굴에 비누를 잔뜩 묻힌 채 발을 씻으려고 몸을 굽히려다 세면대에 코를 심하게 부딪친 것이다. 코끝도 아니고 코허리도 아닌 이른바 콧대가리가 세면기 모서리와 심하게 충돌했다. 모기에 물린 것처럼 벌겋게 부어오르긴 했으나 코뼈가 무사한 것으로 보아 내 콧대가 세긴 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왕년에 콧대가 세다느니, 거만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던 편이라 실속 없는 콧대에 대해 주눅이 들어있는 상태인데 코를 더욱 강조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대면 할 생각을 하니 난감했다. 더군다나 바로 그 다음날은 내 생일이 아니던가, 제기랄! 안 되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그런데 이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말이던가?
해마다 여름이면 바닷가로 가기보다는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것이 나의 피서법이었다. 그래서 어느 해는 아가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기도 하고 또 어느 해는 포우의 단편과 로버트 블록의 [사이코]를 읽기도 했다. 그리고 [아웃사이더]를 쓴 콜린 윌슨의 [살인의 미학]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밥맛을 잃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는 것에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안 따라주는 것이다. 사주팔자에 총명하다는 부분이 있어서 머리 하나는 제법 쓸만한 쪽으로 믿고 있었는데, 갈수록 내 머리가 깡통이 돼 가는 걸 느끼고 있다.
그래도 올 여름 피서는 해야겠기에 무언가 읽을 책이 없나하고 빈약한 서가를 헤집다가 읽다 만 책들이 많다는 것에 내심 놀랐다. 윌리스 마틴의 [소설 이론의 역사], 페테 V 지마의 [문예미학],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쟈크 라캉의 [욕망이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마음]. 프롬의 [파괴란 무엇인가], 까뮈의 [반항인] 그리고 내가 산 기억도 없는 [모택동의 외교전략사]나 혹은 [한국정치의 지도 이념] 등도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라캉의 [욕망이론]을 올해에 나의 피서책으로 삼기로 했다. 그런데 해설부분의 대여섯 장을 지나고 부터는 영 진도가 나가는 않는 것이다. 그 부분에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은 부분도 많아서 여러 번 읽었다는 흔적도 있는 셈이었다. 이제 책 읽는 것조차 한계에 달한 것이나 아닐까하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쉬운 부분(취향에 맞는)부터 읽어보려고 욕망이론과 비평이론을 지나 시각예술이론에서 시선과 응시의 분열 쪽을 택했다. 어쩌면 이쪽이 문학적인 접근을 하기가 쉽다는 생각에서였다. 시선과 응시에관한 작품들이 생각났다. 로브그리예의 [엿보는 자], 최수철의 [시선고]. 바타이유의 [눈 이야기], 유르스나르의 [흑의 단계]. 어쩌면 뜻하지 않게 대어를 낚을 수 있는 낚싯밥을 얻게 될지도 몰라... 그런데, 그런데... 아, 내가 깨달은 건 역시 주제파악을 못하는 내 어리석음 뿐이다.
프로이드나 융, 혹은 프롬의 책들을 읽을 때는 무리가 없었는데(? 이해했다기보다는 책을 읽어나간다는 측면에서) 라깡의 이론은 흥미 있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한 페이지도 터득하기가 힘들었다. 번역을 도왔던 한 사람중에 [라깡이라는 이름의 유령을 애도하기]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던데 그것은 라깡이 그만큼 괴물이라는 뜻인가? 어쨌든 나에게는 소화불량의 책이기 이전에 씹지도 못할 책임을 느끼며 다시 한번 비애를 삼켰다.
재미있는 것은, 엊그제 모모한 모임(그 흔한 세미나)에서 만난 정신과 의사에게 라깡에게 쉽게 접근할 비법이 없을까하고 자문을 구했더니 책을 세 권이나 만들어 낸 그 사람은 라깡도 모르고 욕망이론도 들은바 없다고 한다. 그에게서 들은 충고는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글쓰기에 대한 평범한 이론뿐이었다. 내게 너무 익숙해서 식상한 얘기들을(실천이 어려운 이론들임) 그는 아주 권위 있는 시혜자의 표정으로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커다란 진리를 듣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차를 얻어 타고 모모한 곳을 다녀오는 동안(단둘이 아니고 다섯 사람이 함께였음) 그가 생각한 내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어떤 전형의 틀에 맞추어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주아주 평범하게. 하긴 오랫동안 내가 노력해온 것이 그것이었으니까... 남의 눈에 뜨이기 싫어서 과거의 나는 아주 평범하게 비쳐지려고 노력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하기 전이나 혹은 유학을 하기전에 아주 평범한 내게 와서 “왜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세요?”라고 하는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제 나는 평범이 지나쳐서 그것에 밟히고 있는 중이다, 아주 납짝하게.
한마디로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얘기지 뭐...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듯 하다. 어느 구석에서 싸르트르의 [말]이란 책이 튀어나와서 그것을 읽기로 했다.
싸르트르의 [말]을 사게 된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으나 아마도 [말]이란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때 나는 말(언어)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언어와 관련된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비트겐슈타인의 ‘파리잡이 항아리’에 매료된 것도 역시 언어에 관한 관심 때문이었고 소쉬르의 ‘기표’ ‘기의’라는 껄끄러운 표현도 그 때문에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무로 돌아갔다. 내 머리는 지금 알뜰하게 비어있다. 기억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사실은 애초에 기억한 것도 없었으니까.
싸르트르의 [말]은 1964년도 노벨문학상의 대상이 된 작품이란다. 수상을 거부했다는 것으로 더 주목을 받았었던 작품이기도 한 모양이다. 내가 책을 샀던 당시 게걸스럽게 책을 읽어내지 못한 이유는, 지금 기억할 순 없으나 아마 강한 기대를 갖고 책을 대하다가 초반부에서 실망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번역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구토]나 [벽] 등의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책을 펼치다간 서두에서 당황하게 되고 만다. 프랑스판 [백년동안의 고독]이라도 되나? 하면서 이름 외우기가 복잡해 계보도 한 번 그려봤음직도 하다. 그러나 2,30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싸르트르의 독특한 냄새가 슬슬 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픽션을 가미한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 류의 독백에 가까운 것이다.
1부 글읽기와 2부 글쓰기로 나뉘어져 있는 이 책은 아버지를 일찍 여이고 20살의 과부 어머니와 외가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서 외조부 샤르르 슈바이쳐(알버트 슈바이쳐의 큰 삼촌)의 애정과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는 동안 다양한 독서 경험과 더불어 할아버지와 두 여자(할머니와 어머니)그늘 아래서 세상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갖가지 상상과 철학적 비유로 심도 깊게 표현되어 있다. 그가 약간의 시니컬한 어투로 자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명성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살아 생전에 부담스러운 명성은 영광이 아니다, 라고 표현했다.
할아버지 서재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땐 즉각적으로 [구토]의 로캉뗑이 연결되었고, 처음으로 자기 책을 갖고 그 내용에 접근하는 과정에서도 개성 있는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사팔뜨기에다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은 글읽기와 글쓰기에 대해 더욱 천착하게 되는 동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한 존재가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노력과 신념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그의 말대로 이 책에는 전쟁과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사건이 어우러져 한 커다란 존재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끝으로 글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강한 표현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대신 하겠다.
- 나는 이미 나의 종교를 발견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세상에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서재, 나는 거기서 대 사원을 보았다. 성직자의 손자인 나는 7층에서, 말하자면 세계의 지붕 위에서 ‘중앙수목’의 가장 높은 꼭대기 가지에 매달려 살고 있었다.
- “정말이지 잘 볼 줄만 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본 것을 써먹을 줄 알아야지. 모파상이 어렸을 때 플로베르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모파상을 나무 앞에 앉히고 두 시간 동안에 그것을 묘사하게 했단다.”
그래서 나는 보는 것을 배웠다. 장차 오리야크의 유명한 유물을 찬양하는 가인이 될 팔자를 지닌 나는 깔판이나 피아노나 괘종시계와 같은 유물들을 시무룩한 낯으로 관찰했다. 이런 것들도 앞으로 내가 벌과처럼 쓰게 될 문장에 의해서 영원히 살아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관찰을 했다. 그것은 우울하고 실망적인 장난이었다.
끝.
Ps.나는 복날에 태어났지만 더위는 웬만해서 타지 않는다. 29도까지는 땀 한 방울 안 흘릴 정도로 찬피동물에 가깝다. 그런데 30도만 넘으면 땀을 흘리기 시작하는데 으악!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다. 짜증나! 짜증나! 열대야는 물 열 대야만 끼얹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雜說
어제 출판기념회에 갔었다. 정신상태가 쑥밭이 된 기분으로 여러 사람들 속에 섞이긴 싫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어 할 수 없이 갔었다. 결과는 쑥밭이 쑥떡이 되어 온 기분이다. 잠도 안 온다. 수많은 오류들... 왜 나는 이런 방식의 삶을 택했을까? 왜 변화하지를 못하는 걸까? 아주 어릴 적, 짧았던 한 순간에 깨달았던 그 무엇이 내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아직 내 삶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태어나기 전, 혹은 그 전 생에서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의 정체를 모른다. 의식의 세계로 자꾸 떠오르려는 그것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다시 가라앉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잊었다. 아니, 잊으려고 애를 썼다. 세상과의 同化를 위해서. 그런데도 가끔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듯 나를 부른다. 그리고 음습하고 클클한 목소리로 ‘넌 세상과 안 어울려, 네가 있을 곳은 아무 곳에도 없어’하고 속삭인다.
어제도 나는 내가 예상했던 사람들과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만남을 가지면서 내가 예상했던 말들을 들었다.
‘나는 그대를 생각해 주는데, 그댄 왜 그걸 몰라주나?’
’우울한 표정 짓지 말고 좀 즐겨.‘
‘글은 왜 안 쓰는 거야.’
‘그대는 너무 자존심이 강해, 세상 그렇게 살면 손해야!’
그들은 자존심과 무관심조차 구별을 못 하고 있다. 아니, 속으로는 내가 바닥에 엎드려 기기를 바라면서 자존심 운운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너무 일찍, 너무 깊이, 너무 많이 알아버린 나에게 어리석은 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기라고? 살아남기 위해서 날더러 엉금엉금 기라고? 웃기고 있네. 난 너희들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 난 잠시 외출을 나온 것뿐이라구...
그리고 집단 히스테리의 풍경들. 아니, 그건 집단 나르시즘에 가깝다. 나이트 클럽에서 남녀노소 없이 흔들어대며 이건 ‘끼’야. ‘끼’가 있어야 글을 써, 하면서 땀에 흠뻑 젖어 자기 합리화에 취해버리는 군상들. 그런데 그 속에 끼어 있던 나는 무얼까? 나는... 나는 아마도 악화 속에 끼어 있는 양화다. 그리고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라고 한 그레샴의 법칙대로 나는 서서히 세상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떠나기엔 참으로 재미있는 세상이다. 무대가 비좁아 서로 부딪히고, 부딪쳐 밀리다가 사람에 치어 춤도 못 추고 어처구니없이 서 있어야 할 정도 몰려 든 그 많은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 어떤 ‘끼’들을 갖고 있는 걸까? 궁금한데 나중에 그곳에 한 번 더 가서 알아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