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desk 98

사평역/임철우

푸른얼음 2007. 1. 4. 14:08
 

1998년 x월 x일


         [사평역]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 중에서                             

        문학과 지성사/초판; 1984년 6월/재판;1996년 8월/2쇄발행

 


하루 중에 제일 무섭고 쓸쓸한 시간은 오후 4시부터 6시 사이이다.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날이면 나는 거면증 환자처럼 잠을 잔다. 쏟아지는 햇빛이 숙면을 앗아가긴 해도 나는 한 마리 동물처럼 죽은 듯이 늘어져 잔다, 아니 그냥 누워 있는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내 머리 속은 스스로 지난 시간들을 깨끗이 지워내는 작업을 한다. 그러면 내 의식은 병원의 벽처럼 희게 빛나며 멍청해지기까지 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엎드린 그 무게만큼의 존재감을 침대의 스프링 속으로 가라앉히며 내 의식을 죽이고 있다. 바로 누우면  창문이 보이고, 창문 앞에 길게 버티고 있는 나무가 보이기 때문에 나는 엎드려 있는다. 어느 결에 황톳빛으로 변해 버린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 보기가 싫어서이다. 평화인지 무기력인지 모를 이 시간은 언제나 내게 익숙하다.

누워있는 것이 지겨워지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물처럼 배고픔을 끄기 위해 먹기 시작한다. 밥도 먹고 빵도 먹고 과자도 먹고 술도 먹고 쥬스도 먹고 커피도 먹는다. 한꺼번에 먹는데도 포만감은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얼추 허기가 가시게 되면 나는 유령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한다.

피돌기가 제대로 잡히는 듯 하자 아까부터 혼자 돌아가던 CD의 음악이 비로소 귀에 들어온다.  엊그제 교보에서 샀던  Dreyfus Jazz Collection이다. 들을 시간이 없었다가 이제 들어보니 귀에 익은 제목이 더러 있다. ‘그랑데 아모르(위대한 사랑)’? 아 그래, 이건 몇 년 전 스물아홉의 청년이 내게 선물했던 테이프에 수록되었던 곡이다. 귀에 익은 곡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자꾸 쓸쓸한 기분이 들까? 아홉 번째로 나오는 저 ‘빌리’라는 곡 때문일까? 이 역시 귀에 익은 음악인데 이 곡은 마치 낙엽이 쌓인 가을 길을 비를 맞으며 걷는 듯한 처연함과 청승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음악 때문에 쓸쓸한 것 같지는 않다. 무엇때문일까? 나는 추위를 느끼고 숄을 찾아 걸친다. 그때 보았던 벽시계, 아... 그랬구나. 벌써 4시가 지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시간대에 집에 있었던 일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아직도 느껴지는 이 쓸쓸함이 나는 무섭다. 조금 있으면 어둠이 내리겠지...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은 엄연한 내 인생의 몫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도 나를 동정해주지는 않는다. 내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밖에, 나는 어둠이 연기처럼 스며들지 못하게 덧문까지 닫고 방안의 불을 켠다. 스텐드까지 켜 놓고, 그리고 책을 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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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우의 [사평역]은 오래 전부터 귀에 익은 작품이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찾아 읽어보지 않았던 것은, 내 머리 속에 제멋대로 들어앉은 이미지를 너무 믿고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성에가 허옇게 낀 유리창, 그리고 한 청년이 창가에 서 있고, 또 창밖의 어두운 공간에 희끄희끗 날리는 눈발들... [사평역]과 연결되어 기억나는 이런 이미지들은 전에 TV문학관 같은 프로에서 보았던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방영되었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그의 작품을 보고 내가 왜 진작 그의 글을 많이 읽어내지 못했던가 하고 후회를 했다. 내가 읽었던 그의 작품은 [포도씨앗의 사랑] 뿐이었는데 크게 매력적이진 못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나는 그를 재평가했다. 절제된 문장과 묘사력이 오정희의 문장과 맞먹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오정희와는 또 다른 개성의 장점도 느낄 수 있었다. 주제와 이미지의 형상화작업에서 오정희가 약간의 신비적인 경향이 있다면 임철우의 글에서는 reality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인물의 설정과, 그 인물이 지닌 삶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군더더기도 없는 문장들이 그의 탁월한 묘사력을 느끼게 했다.

나는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서 두어 번 눈물을 흘렸다. 작중 인물들에게 개개의 신산한 삶을 떼어주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각자가 자기 몫을 감당하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난롯가에 모여 서서 서로 훈훈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삶의 혹독함을 넘어서게 하는 기묘한 전략 때문이다. 그것은 혹독함을 이기기 위해 희망이라는 막연한 괴물들한테 의지하는 것보다 실제로 인간끼리 살 부비며 사는 것에 희망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전략인 것이다.

 이 작품은 한정된 공간에서의 기다림이 얼핏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하게도 했지만 후반에서 어두운 현실을 따뜻하게 풀어보려는 작가의 의도가 무리없이 드러나서 내 개인적으로는 보기 드문 수작으로 느껴진다. 인물들의 삶을 표현하는 훌륭한 문장들을 옮겨보고 싶지만 바빠서... (오늘 밤 안에 중요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시작도 안하고 있음)

나는 여지껏 누군가의 작품을 필사해 본 적이 없는데 (시도는 했다가 중도에 그만 둔 적은 두어 번 있음), 이 작품은 틈나는 데로 그런 걸 해 보고 싶게 한다. 그런데 나는 과연 오늘 밤 안으로 숙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모르겠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라는 시를 또 찾아봐야 될 것 같은데...

아, 찾아냈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아,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뎐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주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로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             .           .


낯섦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