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동인문학수상작품집
1998년 x월x일
`97 동인문학상수상작품집
단 1초간의 실수로 썩은 심장이 들어있는 2년치의 일기가 날라가버렸다. 두 개의 파일을 불러와 일부분을 복사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실수다. 백업파일을 불러와 복구시키려 했지만 그 방법이 생각난 것은 이미 때를 놓친 뒤의 일이라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고스란히 날려보낸 것이다.
2년 동안 나는 남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다난한 시간을 보냈다. 일기가 날라 가버린 것을 기화로 그 시간들이 내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지금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있긴 해도 그 시간의 징후들은 엄연히 나의 현실을 무참히 지배하고 있다. 나는 내 현실의 압박감을 견디기 위해 빨리 무언가 할 꺼리를 찾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것은 책을 읽는 것일 게다. 나는 대출카드를 들고 불현듯(?) 집을 나섰다.
제 28회 동인문학상 수상집,
나는 소설(글)을 읽을 때 처음부터 작가를 보고 선택하지 않는다. 소설의 내용을 보고 마음에 들으면 그때서야 제목을 보고 작가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비로소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작가가 아니라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이른바 베스트 셀러도 거의 보지 않는다. 아니 일부러 보지 않는 쪽이 더 많다. 그래서 나의 책읽기는 언제나 더디고(유행에) 탈 대중적이다.
수상작 <그는 언제 오는가> 신경숙
신경숙의 작품을 처음 대한 것은 오래 전, 모 문예지에 실렸던 <연등>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이다. 그때 나는 묵직한 질감과 칙칙한 색깔들로 주조를 이룬 유화만을 보다가 그 사이에서 맑고 투명한 느낌을 주는 수채화를 보는 듯한 청량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후에 본 것이 <배드민튼 치는 여자>이다. 이때도 나는 글의 주제와 제목이 주는 시적 은유의 절묘한 만남에 경탄을 느꼈다. 그러나 그후 [풍금이 있던 자리]라는 그녀의 작품집을 보고 나서는 슬그머니 식상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은 여전히 수채화였지만 유화 속의 수채화를 볼 때와 수채화만 질리도록 보는 느낌은 달랐다. 수채화만 잔뜩 보고 나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난 역시 유화체질이라는 것이다. 수채화는 산뜻하기는 하지만 가볍고 유화는 칙칙하고 무겁다. 그러나 유채화가 주는 질감은 수채화에서 나타낼 수 있는 것과는 질이 다르다.
이 작품은 물을 많이 사용해서 산뜻한 느낌을 주었던 다른(내가 읽어보았던) 작품들과는 달리 물을 적게 쓴 담채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산뜻함이 가셔진 만큼, 그만한 무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라는 거대하고 불가해한 존재를 감당해내기에는 약간의 역부족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에서 ‘그’란 죽음을 내포한 어떤 불가해한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고 없이 다가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연민과 공포를 안겨주는 거대한 존재. 유한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도 없는, 그리고 그 유한함마저 무력하게 ‘그’의 손에 맡겨야 하는 초라한 존재의 의미 구현을 남대천으로 돌아오는 연어회귀와 맞물려서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자 자신이 태어난 곳, 즉 생명의 기원인 남대천으로 돌아오는 연어들의 피나는 여행길은 곧 인간 삶의 여정과 대비되고 있다. 북태평양에서 8.000킬로미터를 거슬러 남대천으로 돌아온 연어들은 알을 낳기 위해 그러잖아도 물을 거스르느라고 상처 입은 몸으로 자갈을 밀어내고 산란터를 다진다. 그 산란터에 붉은 알을 쏟아놓는 암연어, 그리고 그 암연어가 쏟아낸 알들 위에 흰 정액을 뿌리는 숫연어, 그들은 최후의 힘을 모아 산란한 자리를 자갈로 덮는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몸은 찢기도 뜯기고 멍들고 갈라지고 급기야는 까맣게 타 죽는다. 이와 같이 작가는 본능적인 삶의 의지, 생명의 존속만이 ‘그’에 대항하는 길이라는 것은 암시한다. 유한한 존재의 허무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공포감 등을 본능적인 삶의 의지로 귀착시키고 있다. 즉 ‘그’가 언제 오든 상관없이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수밖에 ...... 그런데 왜 나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존재가 크게 다가오지 않는 것일까. 이 말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부피를 독자가 제대로 느끼질 못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언제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사회적이지 못하고 개인적이라서 약간의 콤플렉스를 느낀다는 뜻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아니면 어쩌지? 기억이 확실치 않아서). 그러나 무슨 운동권이나 노동자의 얘기가 꼭 들어가야만 개인적 에서 벗어나는 것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이 꼭 우월하다는 뜻도 아니다. 그런데도 신경숙은 자신의 개인적인 얘기를 곰탕 우리듯 많이 우려먹는 다른 작가들보다도 더 개인적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혹시 그게 그녀의 섬세함과 함께 그녀가 갖는 개성일까?
아마 나는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에서 처럼 무게에의 강요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뿔나게스리......
<사십 세> 고종석
이남희의 소설집 [사십 세]를 보면서 자신의 사십 세를 쓰는 재미있는 글이다. 재미있다면 조금 어폐가 있을까? 음~ 방법이 재미있다는 뜻이다. 일전에 한 스승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어머니)의 부재라든가 혹은 지독한 가난, 그리고 신통치 않은 학벌, 또 가출의 경험, 이런 것들이다. 지금 시대엔 이런 조건들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만 예전 글들을 보면 사실 위의 사항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있다.
이 글도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비인간적인 행태로 고난을 겪은 주인공이 아버지를 증오했으나 자식이 생기고 나이를 먹다보니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결국은 몇 년씩이나 불참했던 아버지의 기일에 자식을 데리고 참석하러 간다는 내용이다.
본문 중에 마음에 닿는 구절이 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그 중오의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생물학적으로 분리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자신을 대상과 분리시킬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얄궂게도 그 인간을 분열로 몰아간다.”
맞는 말이다. 나도 아버지를 증오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가끔은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그런 부분들을 내게서 발견하곤 기막혀 할 때가 있다. 아마도 작가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필요악인지도 모르겠다.
정신과 의사가 현대화된 무당이라는 표현도 과격하지만 재미있다.
<도드리> 김영하
세상에! 그 흔한 연애방정식을 이렇게 풀어내다니......
김영하의 방식은 늘 새롭고 도전적이고 성공적이다. 그의 작품은 딱 두 편 보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무리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가 선택해서 읽은 작품에 대한 느낌은 그렇다. 그의 또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나는, 나를...]과 [호출] 등을 나는 책방에서 대충 훑어보긴 했었는데 알려진 만큼 나를 끌진 않았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해서 본 두 작품, [도마뱀]과 [도드리]에는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르는 감동(적절한 표현인가?)을 느낀다.
‘도드리’는 서양 음악의 악보에 그려진 도돌이표와 비슷한 뜻을 가진 국악의 형식인 것 같다(?국악에 대해서는 무지함). 작가는 이러한 형식을 빌리어 스무 살에 느꼈던 사랑, 서른 살인 지금까지도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사랑에 관한 얘기를 뫼비우스 띠처럼 정의를 내리지 못할 혼란스런 사랑이야기를 1장에서 7장까지 지그재그로 넘나들며 얘기하고 있다. 작가는 도드리의 형식으로 작품을 이끌어 나가며, 도드리의 뜻으로 사랑을 정의해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영산회상’이 합주곡임에 비해 ‘도드리’는 혼자 연주해도 부족함이 없는 곡이다. (홀사랑)
-대금을 배우려는 이들이 가장 처음에 부는 곡도 ‘도드리’요, 죽을 때까지 어려워하는 곡도 ‘도드리’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당신은 몰랐기 때문이다. (첫사랑, 그리고......)
-세 달만 열심히 배운 이라면 누구나 불어제낄 수 있는 그 단순한 곡조가 평생토록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스무 살의 당신은 몰랐던 게다. (미완의 사랑)
김영하는 신세대 작가군 중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우리가 흔히 ‘신세대’라고 칭할 때 느낄 수 있는 이미지 중에서 부정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가 ‘경박함’이다. 그 이미지가 앞서기 시작하면 긍정적인 요소인 ‘신선함’을 느끼기가 힘들다. 그러나 김영하의 신선함은 경박함을 덮을 만큼 치밀하게 환상적이고 교묘하게 사실적이다.
<민둥산에서의 하룻밤> 김형경
김형경, [새들은 제 이름을...]으로 한때나마 남성작가들에게 미움을 받은 여자. 나는 그녀가 국민일보문학상을 수상할 당시 문단에 적을 두고 있는 두 사람의 남성에게서 그녀(작품)를 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다지 심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거액의 현상금이 여성에게 돌아간 시새움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나는 이제껏 그녀의 작품을 읽지 못했다. 아, 작년쯤에 <담배를 피우는 여자>를 읽었구나. 누군가 권해서 읽었는데 내가 생각한 수준작은 되었다. 또 그전에 어떤 문예지에서 그녀의 단편을 읽었던 기억도 나는데 솔직히 그때는 남들이 심어준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썩 잘된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제목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 읽은 그녀의 작품을 보고 나는 윽, 하고 비명을 질렀다. 김형경은 의외로 잘 쓰는 여자였던 것이다, 내가 흉내내기 힘들 정도로.
내게 그런 느낌을 주었던 글은 <세상의 둥근 지붕>이라는 글이다. 지난 주에 읽었던 이 작품을 읽을 때 나는 구효서의 <나무남자의 아내>를 떠올렸다. 비슷한 점은 없는 것 같은데 그 작품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번에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을 읽으면서도 나는 또 구효서의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 번>이라는 작품을 떠올렸다. 이 역시 내용이 비슷했던 건 아니다. 왜 두 번씩이나 두 사람의 글이 연관되어 떠올랐을까? 아직 내 능력으로는 그것들을 정확하게 정리할 순 없지만 나는 그들이 글을 다루는 솜씨가 비슷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를테면 작품의 주제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독자들이 퍼즐 맞추기 게임을 하도록 유도하는 고도의 수법이랄까? 이렇게 쓰면 혹시 두 사람이 기존의 여타 작가들을 누르고 대단한 작가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한 특정 작가가 쓰는 작품들이 모두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작가든지 수작이 있을 수 있고 태작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평가하는 수준도 작가의 생각과 독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독자들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으로. 그런 의미에서 김형경의 작품과 구효서의 작품이 동격이 될 수는 없다.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은 이혼한 부부가 만나 개심사를 찾아가면서 자신들의 과거, 즉 이혼하게 된 배경과 갈등과 이해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서로 간의 몰이해로 갈라섰지만 여자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남자는 여자의 병실로 찾아가게 되고 수술을 앞둔 여자의 소원대로 둘은 개심사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생활을 반추하며 뒤늦게 서로의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남과 여로 갈라져 제도화된 역할에 서로가 진저리를 쳤던 시간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했지만 작가는 내 생각처럼 페미니즘보다 휴머니즘을 더 윗길에 두고 있다. 얌전한 로드로망인 셈이다.
<나는 기억한다> 김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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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내일이 13일의 금요일이라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고 빨리 통신에 올린 다음 신경을 끊어야겠다. 아직 시작도 못한 다른 일 때문에 자꾸 마음이 흐트러지고 있다. 그 일을 일찍 끝내게 되면 나머지를 읽고 다시 올릴 수 있을지도......